▣▣,파스퇴르의 업적과 만든 발명
프랑스의 화학자, 미생물학자. 동부 프랑스 쥐라현 출생. 파리의 에콜 노르말에서 물리와 화학을 공부하고, 모교의 조수로 활동하였다. 최초의 연구는 1848년 타르타르산에 관한 것으로 타르타르산염과 파라타르타르산염의 구조상의 차이를 광회전성의 차이로부터 밝혀냈다. 디종중학교 물리교사를 거쳐, 1849년 스트라스부르 대학 화학교수가 되었으며, 화학조성, 결정구조, 광학활성의 관계를 연구하여 입체화학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때 생물이 입체이성질체의 한쪽만을 이용하여 합성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우주의 ‘비대칭성’을 논함과 동시에, 생명의 화학적 연구에 흥미를 가졌다. 1854년 신설된 릴 대학 화학교수 겸 이학부장 1857년 에콜 노르말 부주사에 취임하였다. 릴의 양조가 비고의 의뢰를 받고 발효와 부패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후 젖산발효는 젖산균의, 알코올발효는 효모균의 생활에 관련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어 1862년 알코올에서 아세트산으로 변하는 것과 아세트산발효에 대해 연구하여 식초의 새로운 공업적 제법을 확립하였다. 또 포도주가 산패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저온살균법을 고안하여, 프랑스의 포도주 제조에 크게 공헌하였다. 한편 부패가 공기 중의 미생물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확인하고, 자연발생설을 부인하였다. 1865년부터 J.A.뒤마의 의뢰를 받고 누에의 미립자병과 연화병에 대한 연구를 계속한 끝에 양잠업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공헌하였다. 1867년 소르본대학의 화학교수가 되었으나 에콜 노르말에서 연구를 계속, 탄저병, 패혈병, 산욕열등의 병원체를 밝혀냈다. 1879년 닭 콜레라의 독력을 약화한 배양균을 닭에 주사하고 면역이 된다는 것을 발견, E.제너 이래 과제로 남았던 백신 접종에 의한 전염병 예방법의 일반화에 성공하였다. 1881년 푸이 르포르에서의 야외실험으로 가축에 탄저병 백신을 접종하여 그유효성을 증명하였다. 1881년 프랑스 학사회 회원, 1886년 파스퇴르연구소 초대 소장에 취임하였다.
파스퇴르업적 : 1957년 모교인 고등사범학교의 교수가 된 그는 20년 동안 발효문제에 관해 연 구했다.
파스퇴르가 릴이과대학에 있을 무렵 그는 이 도시의 알콜 제조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부탁을
받았다. "나의 공장에 있는 나무통 안에는 암만해도 알콜이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 알콜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발효에 관한 파스퇴
르의연구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양조산업은 너무 빨리 쉬어버리는 포도주 때문에 매년 수천만 프랑의 손실을 입고 있었다. 그는 발효액에 있는 박테리아가 그 원인임을 밝혀냈고, 1863년 약 55℃로 가열하면 포도주는 변질시키지 않고 박테리아의 독성만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많이 사용되고 있는 '저온살균법(pasteurization)'의 시초였다.1864년 정부와 과학아카데미의 의뢰를 받아들여 누에의 질병에 대해 조사한 그는 누에병의 원인이 되는 두 가지 박테리아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농민들은 파스퇴르의 동상을 세워 고마움을 표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 도중 파스퇴르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했다. 즉 여러 질병이 해로운 미생물 즉 세균이나 박테리아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이다. 1873년 탄저병이 발생하여 소와 양들이 떼죽음을 당하자 파스퇴르는 탄저병의 원인이 박테리아임을 밝혔고, 닭의 콜레라균도 배양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와 같은 연구를 발판으로 그는 1881년 탄저병 백신을 만들 수 있었고, 나아가 '세균 병인설'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었다.
1888년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계 각국에서 모은 돈으로 '파스퇴르 연구소'가 파리에 세워졌는데, 이 연구소는 에이즈(AIDS) 바이러스를 최초로 분리해 내는 등 현재 세계 최고의 미생물학 관련 연구소이다.
▲세균에 의한 질병의 전염성이 입증되다>
프랑의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1822~1895년)는 화학보다도 미생물학의 업적으로 더 유명하다. 처음에는 화학자였으나 여러 가지 세균에 관한 연구와 발견들로 인해 그의 명성이 드높아진 때문이다. 그는 와인이나 맥주의 제조에 매우 중요한 '발효와 음식물의 부패'에 대한 연구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고안한 우유의 저온 살균법은 그의 이름을 그대로 빌어 파스퇴르법이라 불리우며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또 그는 상처의 감염과 전염병 등이 모두 세균의 작용임을 처음으로 증명하였는데, 그것은 외과 수술에 혁명을 몰고 왔고 프랑스의 양잠업을 구하였으며, 그가 개발한 광견병 왁진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구해 냈다. 특히 세균의 전염에 관한 파스퇴르의 연구 결과는 독일의 과학자 로버트 코치에게로 이어졌고, 1882년에 코치는 결핵의 원인이 되는 세균 발견 보고서를 발표함으로써 질병의 전염성을 증명하였다.
이때 어떤 한 세균과 특별한 질병과의 연계에 대한 아주 중요하고도 정확한 가정이 함께 발표되었는데, 이는 지금도 의학계에서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
코치와 코치의 발견을 낳게 한 파스퇴르의 업적은 미생물 과학을 선도하였고, 면역학, 공중 위생과 위생학의 진보를 이끌었다. 이것은 지난 1000년 동안 다른 어떤 과학적 진전보다도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데 더 많은 기여를 하였다.
▲<거의 매해마다 새로운 연구 성과들을 발표한 파스퇴르>
그렇지만, 파스퇴르의 미생물학적 업적이 보다 화려하다는 것이지 결코 화학적인 성과가 보잘것없다는 것은 아니다. 화학이든 미생물학이든 그의 인생 70여 년 가운데 태반은 연구에 바쳐졌고, 그 성과들로 인해 매해가 빛나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이렇게 '해마다 건강한 아이들을 출산해 내는 산모' 와 같은 학자도 드물 것이다.
스물일곱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스트라스부르 대학의 화학 교수가 된 청년 파스퇴르는, 분자 내 원자 배열의 문제를 통해 그것들의 화학 조성, 결정 구조, 광학 활성의 관계를 연구하는 등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자신의 분야에 대한 연구와 실험을 계속하였다. 이때의 연구들을 통해서 입체 화학분야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릴 대학으로 학교를 옮긴 후에는 연구의 영역도 더 넓혀서, 1857년 젖산균에 의한 젖산 발효를, 1860년에는 효모에 의한 알코올 발효를 증명하여 발효의 의의를 확립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비등점에서 공기를 단절한 플라스크 안에서는 물질이 썩지 않음을 증명하였는데, 이것은 생물의 자연 발생설을 부정하는 확실한 증거 자료가 되었다.
1862년에는 아세트 산의 발효와 알코올에서 아세트 산으로 변하는 것을 연구하여 식초의 새로운 공업 제법을 확립하였다. 1865년에는 포도주에서 산을 죽이는 원인균을 연구하여 저온 살균법을 고안하였는데, 이것은 포도주 제조에 이용되어 프랑스 포도주의 맛과 질을 유명하게 하는 데 크게 일조하였다. 누에 질병에 대해 연구한 결과 감염된 병충의 알에 의한 전염 예방법 등을 발표하여 양잠업의 어려움까지 덜어 주었다.
소르본 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던 1868년에 파스퇴르는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지만 여기에서 파스퇴르의 연구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불편한 몸으로도 연구를 계속하여 1877년엔는 탄저병, 패혈증, 산욕열 등의 병원체를 밝혀 냈다. 또 1879년에는 닭콜레라의 독성을 약화시킨 배양균을 닭에게 주사하면 면역이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백신 접종에 의한 전염병 예방법을 일반화하였다. 1881년에는 양의 면역 실험에 성공하였고, 탄전병 면역에 관한 공개 실험을 하여 그 유효성을 실증하였다. 1885년에는 광견에 물린 소년에게 처음으로 백신을 접종하여 생명을 구하였다. 이처럼 평생을 통한 파스퇴르의 실험과 연구 결과들은 연대별로 살펴보기에도 벅찰 정도이다.
1888년 11월에 파스퇴르의 광견병 예방법 확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파스퇴르 과학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기부금으로 설립된 이 연구소에서 파스퇴르는 죽기 직전까지 소장을 지냈으며 그 사이에도 비이커와 플라스크, 현미경 등의 실험 기구들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의 연구와 실험 정신은 사후까지도 남아 파스퇴르 연구소는 창립 이래 100년간 수많은 연구 결과를 내놓았고 뛰어난 과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인류가 지금처럼 보다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누리도록 기여한 것이다.
▲실험 중인 파스퇴르》
▲ 칼스버그 연구소장을 맡았던 에밀 크리스티안 한센>
고대인들은 사람이 질병에 걸리는 이유는 신의 저주를 받았거나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여 주술사의 힘을 빌어 질병을 퇴치하려 했다.
그리스의 의학자 히포크라테스(기원전 460~370년)는 질병의 원인이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 존재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가 '기질 체액론'을 도입한 이천년이 지나도록 그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으며 17세기에 레베후크가 현미경으로 미생물을 발견하였음에도 질병과 미생물과의 관계를 밝혀 내지 못하였다.
1820년 당시 영국의 템즈 강이 오수로 흘러 넘쳐지만 런던의 상인들은 강물을 식수로 판매할 정도로 질병의 원인을 밝혀 내지 못하다가 현미경의 발명 이후 200년이 지나서야 1861년 파스퇴르의 연구에 의해 미생물의 자연 발생설은 부정되고 인류에게 질병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찾아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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