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대 대통령 이승만 별세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 1948년 5월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장에 오른 뒤, 7월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철저한 반공정책을 폈다. 한국전쟁 때는 휴전을 반대하였고, 1952년에는 재선이 어렵게 되자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로 개정, 제2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54년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철폐하는 사사오입 개헌을 강행하였고, 1956년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60년 3월 15일 대통령선거 때 여당(자유당)과 정부가 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4선되었으나, 전국적으로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벌어짐으로써 4 · 19혁명이 발발하였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은 결국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망명한지 5년 만인 65년 7월 19일 호놀룰루의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90세로 운명했다. 나흘 뒤 7월 23일 이 전 대통령의 유해는 미 공군수송기 편으로 김포공항으로 운구됐다. 양자인 이인수씨를 비롯한 유족들은 당초 정부에 “건국 대통령으로서 국장으로 예우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야당인 민주당과 학생·시민단체들의 반발에 부닥치자 정부는 국민장으로 결정했다. 이를 유족들이 거부해 결국 이 전 대통령의 장례는 사저였던 서울 종로 이화장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유해는 7월 27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영결식을 한 뒤 수십만 명의 시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출생-사망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 - 1965년 7월 19일
가족
배우자 프란체스카
1956~1960.04 제3대 대한민국 대통령
1952 제2대 대한민국 대통령
1951 자유당 창당 총재
1948.07 제1대 대한민국 대통령
▲1992년 3월 19일 0시 15분 92세의 나이로 타계
1992년 3월 23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영결식
故 프란체스카 여사 유언
다같이 통일에 힘쓰고, 장례는 검소하게 치르도록 하십시오"
『죽기전에 틀니를 잊지 말고 꼭 끼워다오.』
1992년 3월 19일 92세를 일기로 타계한 프란체스카여사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이 틀니는 여사가 22년 동안 사용해온 것이다.
프란체스카여사는 초대 대통령 李承晩박사의 부인으로 32년간 李박사를 모셔오면서 온갖 영욕을 겪었다. 李박사가 65년 7월 하와이에서 별세한 뒤, 5년간 모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살다가 70년 5월 16일 다시 서울땅을 밟자마자 프란체스카여사는 양자 이인수(명지대 법정대학장) 내외에게 우선 틀니를 하러 가야겠다고 말했다. 여사는 속옷 안쪽에 주머니를 달아 그 속에 3천달러를 넣어 왔다면서 치료비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것이라고 덛붙였다.
가족들은 그때부터 이 속옷을「스위스 비밀은행」이라고 불렀다. 그때 입고 온 속옷들은 15년 넘게 사용하다가 지금은 李박사기념과에 보관되어 있다. 여기저기 헝겊으로 꿰맨 자국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고 기념관을 찾는 사람들은 말한다.
며느리 조혜자씨가 프란체스카여사에게 왜 기술이 더 좋은 외국에서 틀니를 하고 오시지 않았느냐고 묻자『너희 아버님이 독립운동할 때는 1달러도 아까워하셨는데 어떻게 몇천달러를 외국에서 쓰느냐』고 되물었다. 그리고 6.25가 터진 날 아침에도 경무대에서 치과치료를 받아봤는데 역시 치과기술을 한국의사가 제일 낫다고도 했다.
프란체스카여사의 틀니는 70년 당시 메디칼센터 치과과장 최상열박사가 만들었다. 그후 프란체스카여사는 외국의 귀빈들이 올 때마다 자신의 틀니를 자랑하며 여기서 틀니를 하고 가라는 말을 잊지 않고 했다.
프란체스카여사는 숨을 거두고 이틀전쯤 호흡이 어려워지자 자신의 틀니를 빼놓아 침대머리맡에 놔두었다. 며느리 조씨는 평소 시어머니가「꼭 틀니를 끼고 李박사를 만나야겠다」「죽기전에 꼭 끼워달라」고 당부해, 임종 직전에 끼워드렸다는 것이다.
평소 근검절약하기로 이름난 프란체스카여사는 74년 8월 박정희대통령의 부인 육영수여사의 장례식을 TV로 지켜본 뒤 그때부터「유언」을 남겼다.
『내 죽거든 꽃을 사용하지 말아라. 그게 돈으로 따지면 얼마나 비싼가. 쓸데없는 곳에 돈 쓰는 것보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게 훨씬 낫다.』
속옷은 15년, 양산은 30년 사용 "내핍생활을 제일 많이 강조"
프란체스카여사는 며느리 조씨에게 틈만 나면 유언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노인들의 잔소리 정도로 들을 수도 있었지만 언제난 일관되게 말씀했다고 조씨는 회상했다.
『어머님은 자신이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였다는 사실을 늘 자랑처럼 말씀하셨습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는 우리가 독립된 것이 아니니까 내핍생활을 해야한다는 게 어머님이 제일 많이 한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20년 넘게 모셨지만 절약하시는 습성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62년 양자 이인수씨가 하와이로 李박사 내외를 방문했을 때 프란체스카여사에게 선물했던 국산 파라솔을 30년 가까이 사용해 온 것을 비롯해 물자아끼기는 가히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듯하다고 며느리 조씨는 말했다. 46년 장개석총통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가져온 냉장고는 무려 35년 동안 사용했다.
76년 금성사에서 이화장에 에어컨을 기증하자 에어컨은 사용할 입장이 아니라며 돌려보냈다.금성사에사 다시 조그마한 선풍기를 보내왔지만 여름 한철 동안 겨우 한두차례나 틀 정도였다. 그 선풍기는 지금도 새것같다.
72년 이인수씨가 미국유학길에 오르기 전날 밤 프란체스카여사는 양자를 위해 달러지폐를 다리미로 한장한장 다려서 아들의 속옷에 달아준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며느리 조씨는 한국어머니들과 똑같은「모정」을 보여주는 벽안의 시어머니로부터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73년 무렵 당시 이화여대 김옥길총장이 이화장에 가스레인지를 기증하자 프란체스카여사는『아들이 올 때까지는 쓰지 말라』고 해 결국 몇 년 동안 이화장에서는 석유곤로를 써야 했다. 그후로도 김총장은 자주 이화장을 방문, 프란체스카여사의 말벗을 해드렸다.
며느리 조씨는 김총장의 타계소식을 끝내 시어머니에게 알려드리지 못했다.
김총장이 예전처럼 이화장에 오지 않는 것에 대해 프란체스카여사가 궁금해 하자 많이 아픈 것 같다고만 말했더니「아프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인데」라고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카여사는 유언으로「바른 태극기」를 관속에 넣어달라고도 했다. 이 바른태극기는 李박사가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사용했던 것으로 요즘 태극기와는 달리 음효(태극기의 사괘를 나타내는 것)의 간격이 넓다. 생시에 프란체스카여사는 태극기를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고 손자들에게도 늘 얘기해 왔다.
프란체스카여사는 자신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러달라는 말과 함께 성경책과 찬송가를 넣어달라는 유언도 했다. 또 관뚜껑에는 李박사의 친필휘호인「남북통일」을 써넣어줄 것을 당부했다.
며느리 조혜자씨는 29여년간 시집살이를 비교적 짭짤하게 했다는 말로 프란체스카여사의 검약하는 생활을 전했다. 『가뭄이 들었다는 TV뉴스가 나오면 아이들 목욕도 시키지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수돗물을 아껴야 산동네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물을 쓸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어머니는 외모만 서양인이셨지 속은 완전한 한국인이셨어요. 지난해인가 독도사랑회에 10만원을 기증하신 일이 있는데, 남들이야 요즘 10만원은 별 것 아니라고 하겠지만 우리 어머니에게는 10억원 정도하는 큰 돈이었지요. 왜 옛날 시골 어머니들 있잖아요, 우리 어머니가 꼭 그런 분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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