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 전쟁 중에 조선에서의 내정 개혁(갑오개혁)을 주도했던 일본의 이노우에 공사는 삼국 간섭에 의해 국제적으로 일본의 위상이 저하된 것을 계기로 조선에서의 주도권 행사가 여의치 않게 되었다. '300만 엔 차관' 제공 등의 회유책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하자 조선에서는 1895년 7월 이른바 친러파 정권이 성립되었다. 러시아가 일본과 본격적인 무력 충돌을 일으킬 의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일본은 조선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조선 주재 공사를 미우라 고로 육군 중장으로 교체하고 대원군을 이용해 친일파 정권을 부활시키기 위한 궁중 쿠데타를 획책하였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 한국 학계에서는 일본 정부의 지시를 받은 이노우에 공사가 주범이며, 단순하고 무지한 육군 군인인 미우라 신임 공사가 하수인인 것처럼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먼저 일본 정부의 지시 및 교사 여부는 아직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사건의 주범은 당시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의 군인 및 외무성 경찰과 외교관, 우익인 현양사 계열의 조선 낭인을 모두 지휘할 수 있었던 인물인 미우라 고로라고 하는 점이다. 또, 시해 현장에서 직접 하수인으로 활약한 인물들은 지금까지의 통설대로 조선 낭인만이 아니라 일본군인 장교가 직접 개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서 일본의 우익 민간인들이 자행했다고 강변하고 있고, 또 이들이 이른바 한국 합병 후에 자신들의 공로를 과시하기 위해 저마다 자신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자랑하고 있는 것을 너무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문제점도 있다.
또 하나, 친일 정권 부활을 위한 궁중 쿠데타가 중요 과제였고, 이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조선 왕실, 특히 고종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는 방식으로 명성황후 시해라는 극단적인 수단이 채택되었다고 보이는데,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관여한 인물 중에 후쿠자와의 영향을 입었던 국권파의 한 그룹인 '게이오(慶應) 출신' 우익의 움직임이 시해 사건 1년 전에 발생한 김옥균의 암살 사건과 묘하게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