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세균부대는 당시 세균전의 필요성을 역설한 이시이의 건의에 따라 1935~1936년 히로히토 일왕의 칙령으로 창설됐는데, 당시 모두 4개 부대로 구성되었다. 우선 하얼빈 인근의 ‘관동군 방역급수부’라 불렸던 제731부대(1941년 8월 1일 만주 제731부대로 개칭)를 비롯해 ▷창춘 인근 멍자둔의 ‘관동군 군마방역국’이라는 제100부대 일명 ‘에이’라 불리는 난징의 제1644부대 일명 ‘나미’라고 불리는 광둥의 제8605부대가 그것이다. 이들 부대들은 일제의 세균전 연구책임자인 이시이가 직접 부대장으로 근무한 731부대를 중심으로 합동작전과 연구를 진행하였다.
특히 살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친 731부대에서는 1939~1945년까지 한국인 6명을 포함해 1467명이 생체실험으로 희생당한 것으로 공식 확인되고 있다. 조선인 희생자는 심득룡, 이청천, 이기수, 한성진, 김성서, 고창률 씨 등 6명으로 731유적지에 한글로 그 이름이 남아 있다. 특히 전쟁 종료 후 소련의 일제전범재판에서 731부대 관계자들은 마루타 감옥이 만들어진 뒤, 살아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여기에 731부대는 세균전에 대한 연구에 그치지 않고 1939년 일제가 몽골과 소련 접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소련에 도발하다 대패하자, 소련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강물에 장티푸스균 등을 살포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하였다.
일본 군부는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의 참전으로 731부대가 강탈당할 것을 우려해 즉시 모든 부대시설을 파괴하고, 실험자들을 처분한 뒤 철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공병대가 긴급 투입되어 8월 9일부터 13일까지 4일간 본부동을 제외한 주요 건물들을 모두 폭파시켰고, 당시 생존해 있던 수백 명의 마루타들도 모두 몰살시켰다. 이후 일본 정부는 731부대의 실체를 부인해 오다가 50년이 지난 후에야 부대 존재를 시인하였다. 하지만 1만 명의 중국인·조선족 연합군 포로를 실험용으로 학살한 만행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발뺌하였고, 옛 부대원들의 증언 내용을 확인하는 것 역시 거부하고 있다.
제731부대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인 1932~1945년까지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 마루타 생체실험을 벌인 일제 관동군 산하 세균전 부대를 말한다. 일제 세균전 부대의 본대격으로, 이시이 시로 일본 육군 군의중장의 이름을 따 ‘이시이 부대’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인체실험 대상자로 희생된 마루타(丸太, 일본어로 통나무라는 뜻)라는 말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는 당시 일왕의 칙령을 받아 만든 특수부대로 일제의 꼭두각시 정권이었던 만주국 영토 내에 위치했다. 이곳에서는 조선인과 중국인 등을 대상으로 한 신체 해부, 냉동실험, 세균 투입 등 각종 비인간적인 생체실험이 자행되었다. 731부대는 8개 부와 4개 지부로 나눠져 있었는데, 군의관들은 모두 대학 출신의 의학자와 과학자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한편, 당시 부대 건물은 전쟁이 끝난 후 중학교로 사용되었으며, 2001년부터는 일제 만행을 고발하는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다. 현재 중국 하얼빈 시내에서 남동쪽으로 25km 떨어진 하얼빈(哈爾賓) 핑팡취(平房區) 신장다제(新疆大街) 25호에는 당시의 현장을 일부 복원시킨 ‘침화일군 제731부대 유적지’(侵華日軍 第七三一部隊 遺跡地)가 일반인들에 개방되고 있다. 731부대는 원래 건물 80여 곳에 총면적이 6.1km2였으나 현재는 당시의 본부 건물을 유적지로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