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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계 러시아 록가수 빅토르 최

이모이모 2023. 8. 31. 20:51

▣▣한국계 러시아 록가수 빅토르 최

빅토르 초이는 1962년 카자흐 공화국의 크질오르다에서 태어났다.
17세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초기 곡들은 레닌그라드 거리에서의 삶, 사랑과 친구들과의 어울림 등을 다루고 있다.

노래의 주인공은 주로 한정된 기회만이 주어진 채 각박한 세상을 살아나가려는 젊은이였다.
이 시기에 록은 레닌그라드에서만 태동하고 있던 언더그라운드의 한 움직임이었으며,
음악차트등의 대중매체들은 모스크바의 팝스타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소련 정부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가수들에게만 허가를 내 주었고,
집과 녹음실 등 성공이 필요한 많은 것들을 제공하여 길들였다.

그러나 록 음악은 소련 정부에게는 마땅치 않은 음악이었다.
록은 자본주의 진영의 록 그룹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외에도 젊은이들을 반항적으로 만들었으며, 의사표현의 자유 등의 가치를 중시했다.

따라서 록 밴드들은 정부로부터 거의 원조를 받지 못했고, 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는 관영 매체로는 전혀 소개될 수 없었으며,
마약 중독자나 부량자라는 편견으로 그려지는 수준이었다.빅토르 초이는 18세 때 다니고 있던 세로프 예술 학교에서 성적부진을 이유로 쫓겨나게 된다.
그러나 퇴학에도 불구하고 그는 록 음악에 계속 열성적으로 참여한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파티등의 장소에서 자신이 만든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한 연주를 록 그룹 아쿠아리움의 멤버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가 보게 되어,
그래벤시코프의 도움으로 그는 자신의 밴드를 시작하게 된다.

레닌그라드의 록 클럽은 록 밴드들이 연주할 수 있던 극소수의 장소에 속했다.
이곳의 연중 록 콘서트에서 빅토르 초이는 처음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그는 두 명의 아쿠아리움의 멤버들이 연주를 맡은 가운데 솔로로 연주한다.

그의 혁신적인 가사와 음악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가 유명해지기 전에 그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도전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 위해 실험적으로 가사와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시도는 성공을 거두고, 데뷰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을 모아 키노(러시아어 영화, 극장)를 결성한다.
그들은 빅토르 초이의 아파트에서 데모테입을 만들고, 이 테입은 처음엔 레닌그라드, 그리고 나중에는 전국의 록 매니아들에게 퍼지게 된다.

1982년 키노는 첫 앨범인 45(소록 피아트; 러시아어로 45라는 뜻)를 발표한다.
이 앨범의 이름이 45로 정해진 것은, 이 앨범의 재생시간이 총 45분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46(소록 쉐스트)라는 앨범도 냈다.)

이 앨범에서 빅토르 초이는 음악에 정치적 목소리를 내려는 의지를 내비친다.
"외곽전철"이란 노래는 원치 않은 곳으로 가는 전차에 끼여 끌려가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이런 가사는 분명히 당시의 소련에서의 삶을 은유한 것이었으며, 이 노래는 공연이 금지된다.
이 노래의 메시지로 노래는 반항운동을 하던 젊은이들 사이에 유명해지며 키노와 빅토르 초이는 그들의 우상으로 떠오른다.

제2회 레닌그라드 록 클럽 컨서트에서 키노는 자신의 정치색을 더욱 분명히 드러낸다.
키노는 빅토르의 반전음악인 "내 집을 비핵화지대로 선포한다."으로 1등을 차지하고,
이 노래는 당시 수만의 소련 젊은이들의 목숨을 빼았고 있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더욱 더 유명해진다.

1987년은 키노의 해였다. 7집 앨범 "혈액형"은 "키노마니아"로까지 불리는 사회현상을 불러일으킨다.
글라스노스트로 조금 더 개방적이 된 정치상황은 그의 가장 정치색이 짙은 앨범인 "혈액형"을 만들 수 있게했다.
그러나 앨범의 메시지만이 청중을 사로잡은 것이 아니었고, 앨범에 담긴 음악또한 이전에는 듣지 못하던 것이었다.
대부분의 곡은 소련의 젊은이들을 향한 외침이었으며, 능동적으로 나가서 국가를 변화시키라고 호소했다

몇 개의 노래는 소련을 옥죄고 있던 사회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앨범은 빅토르 초이와 키노를 러시아 젊은이들의 영웅으로 등극시켰다.
이후 몇년간 그는 몇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찍었으며 영화제에 그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미국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 몇 개의 앨범이 더 나왔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으며 밴드는 인기를 유지했다.
그는 소련 젊은이 모두의 우상이었지만, 그는 비교적 보통 수준의 삶을 살았다.
그는 계속 아파트 빌딩의 보일러 실에서 살며 일했다.
그는 자신의 직업을 즐기고 있으며 정부의 보조를 받지 못하고 있고,
자신들의 앨범은 공짜로 복제되어 퍼지기 때문에 밴드를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런 소박한 삶의 방식은 대중들이 그와 더욱 친밀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1990년 키노는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컨서트를 열어 6만 2천의 팬들을 모았다.
1990년 8월 14일 다음 앨범의 녹음을 마쳤으며, 레닌그라드에서 다른 멤버들이 녹음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15일 아침 리가 외곽에서 빅토르 초이가 운전하던 차가 마주오던 버스와 충돌하였다.
차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망가졌으며 타이어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

8월 17일 소련의 유력 잡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의미를 간추린다.

-빅토르 초이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다른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번도 거짓말하거나 자신을 팔아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빅토르 초이였고,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이 다름없는 유일한 락커가 빅토르 초이이다.
-그는 그가 노래부른 대로 살았다. 그는 록의 마지막 영웅이다.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Viktor Robertovich Tsoi
(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 1962, 6.25 - 1990, 8.15)
유명한 러시아의 록 가수이며, 전설적인 록 그룹 키노(КИНО)의 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