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 운동가 김경천 장군
1888년 6월 5일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 승평리에서 김정우(金鼎禹)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김정우는 1895년 일본에 관비 유학생으로 유학, 경응의숙 보통과, 동경 신전구(神田區) 순천구합사학교(順天求合社學校) 공업예비과, 동경고등공업학교 기계학과를 졸업한 후 동경포병공창에서 총탄제조 견습을 마치고 귀국해서 대한제국 육군군기창장으로 일했던 일본 유학파 출신 관료였다.
8살 때 서울 사직동으로 이주했고 15살에 경성학당을 졸업했다.
17살에 일본육군사관학교 부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이때 한국인이 그 학교에 입학하려면 일본천황한테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19살에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하고 22살에 육군사관학교 전과정을 마쳤다. 졸업성적은 언어상 불리하여 1등을 못했지만 종합적인 성적은 여태까지의 졸업생들을 포함하여 최우등이었다
재학중에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졸업 후 일본군 장교 임관을 거부하려 했으나 독립전쟁을 위해 일본군에서 정보를 빼와야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처먹고 임관해 이후 1918년 말까지 기병장교로 복무했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동기 지청천과 함께 탈영,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을 준비하다가 그해 가을 노령 연해주로 건너갔다. 1919년 ~ 1922년, 연해주에서 마적 및 일본군(이 시기 러시아 내전이 한창이던 시절이었으며, 일본군은 대규모로 군대를 시베리아 출병을 했을 당시였다.), 러시아 백군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이를 바탕으로 전설적인 김장군으로 연해주 일대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썼기 때문에 김일성 가짜설의 근거로 인용되기도 했다. 그의 활약상과 위상이 당대 어느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
러시아 내전이 끝난 뒤에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계획이 좌절되어 실의의 날들을 보냈지만 소련 내 한국인들에 대한 교육 등 가능한 독립운동 보조 일을 멈추지 않았다. 1936년 소련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아 체포되었고 1939년에 잠시 석방되었다가 다시 체포되어 8년형을 언도받고 북부 시베리아 수용소로 옮겨져 복역하다가 1942년 1월에 사망했다. 유해를 수습하지 못해서 그의 묘지는 없다.
1956년과 1959년에 소련 군사재판소에서 재심되어 무죄를 선고 받았다. 1998년에는 한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그가 기록한 회고록과 일기형식으로 생애를 기록한 글로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 있다.
KBS 역사스페셜 2012년 12월 06일자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 시베리아의 전설이 되다' 에서 그의 삶을 재조명한 바 있다.
어린이동아는 2015년 8월 19일자에서 암살(2015)의 '속사포'가 김경천 장군과 많이 닮았다고 했다.(뛰어난 총 실력, 사관학교에서 실력을 갖춘 군인 등나폴레옹을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5년 9월 25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풍림스페이스본 2단지아파트 106동 정문 옆에 표지석을 설치했다. 김경천이 서울에 거주하던 시절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김경천 부부 모습
간첩죄로 체포된 김경천장군이 카자흐스카 까라간다 유형소에 들어와 머리를 깍이기 전 모습 193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