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은 1997년 1월 30일에 김정일의 지시로 북일수교 및 경제원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나리타 공항을 통해 방일했다. 일본에서 조총련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지만 기자들에게 신경질을 내는 등 심상찮은 조짐을 보였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사회주의의 실패 운운하는 발언을 했고, 일본의 야마자키 자민당 정책위원장과의 면담을 요청하며 식량 원조, 북일 수교 문제를 논하려 했지만 미국의 압력을 받은 일본이 황장엽과의 면담을 거부해서 13일 간의 일본 체류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쓸쓸하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는 수행원 김덕홍과 함께 2월 12일 바로 중국의 북한 대사관으로 갔다가 다시 한국 총영사관으로 가서 전격적으로 탈북의 뜻을 전달하였다.
북한은 황장엽의 망명을 저지하기 위해 남한이 선물 사러 외출한 황장엽을 납치한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2월 18일에 그 주장을 접었다. 이후 북한은 대규모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하여 압박을 가했고, 황장엽 망명과 관련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황장엽의 망명 요청 불과 4일 후인 2월 16일에 이미 80년대 초반에 망명했던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에게 총격을 가해 끝내 숨지게 만들었다.황장엽이 망명한 때는 중국 덩샤오핑의 사망, 한국의 노동법 안기부법 날치기 파동, 한보사태 및 이한영 피살이 겹친 혼란한 와중이었다. 이후 미국, 중국, 한국, 북한, 일본이 모두 개입된 치열한 외교전 끝에 망명의 뜻을 밝힌지 67일만인 4월 20일에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는 귀순하자마자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외쳤고 "처음으로 유서 깊은 역사의 도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본 심정은 참으로 감개무량합니다"란 소감을 발표했다. 그의 수행원 김덕홍은 "설레이는 마음 진정할 수 없고 남녘형제들과 만나게 된 이 기쁨과 감격은 그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그의 동창인 유창순 전 국무총리와 제자이자 먼저 귀순한 현성일, 최세웅, 신형희 등과 오랜만에 해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