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문화 세개

안중근 의사

이모이모 2022. 12. 18. 20:27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일본의 보호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이에 조선 보호론 실현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함으로써 보호국화의 국제법적 불법성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또한 일부 한국인들의 강력한 항일 투지와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기에 일본은 예정대로 1910년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의거 후 일제강점기에 들어갔음에도 안중근 연구회가 만들어졌다. 특히 놀라운 건 뤼순 감옥의 간수들 중 그의 전담 간수이던 지바 도시치 등 여럿이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스스로 일본인임이 부끄럽다고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일본 내부에서 전쟁보단 협상을 중시하던 소수의 온건파 인물이 사살됨에 따라 팽창주의를 내세우는 강경파들의 입김이 좀 더 강해졌다. 다만 이토 히로부미 한사람의 죽음만으로 일본의 군국주의 폭주가 이루어졌다 보는건 무리가 있다. 이토 히로부미 한 사람이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을 뿐더러 당장 실제 사례들만 봐도 알수 있듯이 군부에 거슬리면 거물급 인사들도 제거당하곤 하던 판국이 었으니 말이다.
안중근은 1879년 9월2일 황해도 해주목 영동방 청풍리(현 황해남도 해주시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 1862~1905)과 어머니 배천. 조씨(白川 趙氏) 조마리아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안태훈은 1891년(고종28) 증광시 진사시에 3등 46위로입격했는데 무슨 연유에선지 자신의 첫째 남동생 안태건(安泰健, 1868~?의 이름을 빌려 썼다. 조부 안인수(安仁壽)는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문관의 품계) 행 진해현감(行鎭海縣監: 종6품) 겸 진주진관병마절제사(兼晉州鎭管兵馬節制使:정3품)를 지냈다.

안중근은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응하여 태어났다고 하여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로 불렸다. 전형적인 무골로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연마한 것으로 유명하고 사격의 명수였는데 놀랍게도 기계로 쏴도 명중률이 고작 50%인 화승총으로 20보(약 10m)나 되는 곳에 놓인 동전을 맞혔다고 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을 '안씨 집안의 총 잘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개화파 청년 그룹이었는데 갑신정변으로 일본 유학박여효의 장학생)이 좌절되자 7살의 안중근과 함께 일가 친척들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두라방 청계동(현 황해남도 신천군 석교리)로 이주하여 은둔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 (종2품) 정현석(鄭顯奭)과 해주 감사가 청계동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16살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박석골 전투 등에서 동학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1909년 10월26일 중국 하얼빈역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이 유명하다. 하얼빈 의거 참조. 다만 안중근 본인은 이 일을 의거가 아닌, 김두성의 명령을 받고 대한의군 참모 중장의 군인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처단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안중근은 대한의군 소속으로 활동했다.

안중근과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대략적인 얼굴상과 특징 뿐이었는데, 사진을 구하기 쉬운 때도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가원태우의 돌팔매에 중상을 입고 죽을 뻔한 일을 겪은 뒤로 자신의 사진이 시중에 나도는 것을 극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러시아어 통역 담당 조도선유동하와 조를 나누어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는 차이쟈거우(蔡家溝) 역에,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매복했다. 하지만 차이쟈거우(채가구) 역의 지하 숙소에 매복하던 우덕순과 유동하는 기차가 멈춘 4분 동안 문이 잠기는 바람에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고, 기차는 그대로 하얼빈 역에 정차했다.

안중근이 이토 저격을 성공한 후 유동하 의사가 멀리서 이를 지켜보고 만세를 외쳤다는데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조를 나눌때 채가구에 우덕순, 조도선, 하얼빈에 안중근과 유동하로 나누었다는 다른 기록이 있다. 거사 당시 다른 인물들의 동선을 파악하기 쉽진 않은데 국가보훈처 기록에는 정황이 이렇다. 일단 우덕순 조는 역 구내 숙소에서 새벽부터 대기하다가 조도선이 역 매점 주인에게 일본의 대신(이토)이 온다는 것 때문에 러시아 군대의 경비가 철통같아 나갈 수가 없다는 얘기를 전했고 우덕순은 거사를 포기하고 대기 중이였다. 또는 이를 수상히 여긴 러시아 군인들에 의해 감금 상태였다. 유동하는 통역과 두 지점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는데 이때 뒤늦게 안중근과 합류했거나 처음부터 안중근을 보조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한편 러시아 당국은 이토 일행의 안전을 위해 하얼빈 역 현장을 엄격히 통제할 예정이었지만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가 ‘많은 일본인들이 역 앞에서 이토 일행을 환영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고 요청해 경호를 강화하지 않았다.
플랫폼에 이토가 하차했을 땐 워낙 많은 수행원들이 함께하여 도저히 누가 이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체념하던 순간에, 이토의 하얼빈 방문을 환영하는 현지 일본인 환영객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준 덕분에 안중근이 이토의 얼굴을 확인하고[11] FN M1900으로 3발 저격했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혹시 몰라 4발 저격했다. 제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제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제3탄은 윗배 중앙 우측으로 들어가 좌측 복근에 박혔다. 3발 모두 급소를 맞혔다고 한다.

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 俊彦),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 다이지로(森 泰二郞),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 淸太郞)에 각각 1발씩을 맞췄다.(안중근 의사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토를 저격한 후 혹, 자신이 이토가 아닌 무고한 늙은이를 살해한것인가 생각이 들어 이토 주변의 남자들을 저격했다고 한다.그리고 총알 한 발을 남기고 체포된다. 여기서 이 한 발을 자결용이라고 추측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이 아니다. 안 의사는 당시 자결할 생각이 없었고 이토 처단 후 재판에서 이토의 죄를 낱낱이 밝힐 생각이었다고 여러 번 진술했다. 그리고 가톨릭에서 자살은 죄악이다. 총알 한 발을 남김은 이미 이토가 쓰러져서 더 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중근의 저격을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그 즉시 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열차 안으로 옮겨졌지만 저격당한지 30분만에 사망했고, 일본 정부는 이토의 장례를 국장으로 후하게 치러줬으며 야마구치현 히카리시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으며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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