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풍경

세종대왕과 한글 창제

이모이모 2023. 10. 23. 19:03

▣▣.세종대왕과 한글 창제

조선의 3 왕이었던 태종(1400-1418)에게는 양녕, 효녕, 충녕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은 남달리 총명했으며 독서광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유고경전] 물론 [제자백가] 모두 암송했다. 이런 그였기에 태종께서는 당시 황희정승등 몇몇 관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첫째와 둘째 아들을 제치고 충녕을 후왕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하여 1418 22살의 충녕대군이 조선의 네번째 임금으로써 왕위에 등극하였다. 그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왕위에 오른 세종대왕이 가장 먼저  일은 국방강화였다. 이종무 장군을 대마도로 보내 왜구들을 소탕, 제압하게 하고 일본과 평화협정을 맺는 결실을 보았다.  1443 최윤덕 장군을 북방으로 보내 야인들을 정벌, 두만강 일대를 정비하여 6진을 설치케 하였다.

국가의 기강이 어느정도 확립되었을 때부터 세종은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세종은 나라를 다스리는 바탕은 인재와 학문에 있다고 생각하여 전국에 걸쳐 인재를 모으게 하였고 이렇게 모인 인재들을 양성할 집현전 세웠다. 그리하여 집현전에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만 모이게 되었고 그들은 도덕, 정치, 경제에 관한 것은 물론 천문, 지리, 의학, 점술등 다방면으로 많은 연구와 수집의 성과를 보였다. 당시 집현전 학자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신숙주를   있다.

 

자신이 위대한 과학자이기도  세종은 해와 달의 움직임으로 시간과 날짜의 순서를 정하는 역법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천문학과 수학 연구에도 중점을 두었다. 세종은 이를 위해 나라안의 훌륭한 기술자들을 불러들였고 당시  방면으로 유명한   하나가 장영실이었다. 장영실은 세종의 과학연구에  힘이 되어 세종 15년인 1433년에 혼천의라는 천문시계를 제작하였고   뒤인 1434년에는 자동으로 시보를 알리는공공 알람시계의 원조격인 자격루 이천, 김조등과 함께 만들었다. 그로부터 3 뒤에 그는 중국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만든 앙부일구 보완하여 해시계 만들었다. 이외에도 장영실은 대량인쇄가 가능한 조선식 청동활자인 갑인자 완성했다. 1441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 개발되어 전국에 배포, 홍수피해 예방용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세종은 농사법에 관한 과학적 설명이 들어있는 농사직설이란 책을 저작케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유용하게 사용케 했다.    

 

세종은 특히 백성을 위한, 백성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에 고심하였다. 흉년에 양식을 빌려주고 추수때 돌려받는 환곡법 제정하셨고 공평하게 세금을 걷기 위해 과세법을 새로 만들어서 부정축재 관리나 부자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1423 세종은 물물거래의 편리를 위해 구리화폐인 조선통보 만들었다. ‚청옥법이라는 법전을 만들어 죄인들을 공평하게 판결케 했으며  정확한 판결을 위해 3번의 재판기회를 갖게 하였으며, 연약한 노인이나 어린이들은 가능한  면죄케 했고 감옥환경도 개선토록 하였다. 무엇보다도 세종은 신문고 설치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들을 들어주었다.

세종대왕은 또한 예술에 깊은 관심을 보여 음악발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때까지는 거의 모든 조선의 음악이 중국의 것을 모방한 것에 유감을 표하고 우리 정서에 맞는 악기와 노래를 만들게 하였다. 장영실과 더불러 혼천의 만든 사람이기도 하며 우리나라 3 악성이라 불리는 당시 유명한 박연은 그나마도 있었던 우리 고유음악인 아악,  궁중음악 개량하였다. 그는 대부분 중국으로부터  악기들을 참고, 우리나라 고유의 정서와 음률에 맞는 65가지 악기를 제작하였으며   가장 걸작은 편경이라는 악기이다. 박연이 정리해 놓은 아악은 오늘날 서양고전음악보다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대왕의 위대한 업적중에 가장 빛나는 업적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우리의 글을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지구상에는 4,000가지 이상의 언어가 있고 40여개의 글자가 있다.  중에서도 한글은 세계 어느 나라의 글자보다 과학적이다. 중국의 한자와 일본의 가나를 제외하고 세계의 모든 문자는 글자 하나하나가 

 

하나하나의 소리로 표기되는 음소문자이다.  중에서도 한글은 영어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음소문자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한글로는 표현할  없는 것이 없으며 알파벳의 언어들처럼 몸짓으로 강조하지 않아도 충분히  표현된다.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에는 우리 글이 없었다. 말은 있었지만 이를 글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자를 빌려쓰거나 신라시대 설총이 만든 이두를 사용할  밖에 없었던 것인데 이는 보통 평민은 물론이고 양반들까지도 익히는  무한한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불편함과 남의 글을 빌려쓴다는 데에서 오는 국가적인 차원의 치욕감은 세종으로 하여금 우리글 창제에 주력케 했다. 집현전 학자들의 연구가 이를 뒷받침하였고 특히 당시 성삼문의 활동은 단연 돋보였다. 성삼문은 중국을 13차례나 오가며 중국의 말과 글을 연구하였고 당시 중국의 유명한 언어학자인 황찬선생을자주 찾아 한글 연구에 어느 정도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

 

세종은 정음청이라는 연구소를 만들어 소리에 가장 가까운 글자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을 거듭했다. 그래서 결국 자음 17자와 모음 11자등 한글의 28자를 만들어냈다. 우리 글과 말을 만들겠다는 세종의 의지와 노력은 세종 23 (1443)  결실을 보게  것이다. 우리의 글을 창제하긴 했지만 곧바로 반포하진 않았고  3년이란 시험기간을 가진  1446년에야 한글을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반포했다. ‚훈민정음이란 말그대로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말소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반포이후에  훈민정음이 순탄하게 사용되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중국에 대한 사대 정신에 어긋나며  보통 백성들까지 글을 알아 무엇하겠느냐란 생각으로 그때까지 써왔던 한자의 사용을 고집한 관리나 양반들이 많았다.   대표적 인물은 최만리였다. 계속되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오히려 만든 한글을  가다듬는 언문청  따로 설치하여 꾸준히 한글을 발전시켜 나갔다.

세종은 1445년에 우리의 한글로 [용비어천가] 펴냈다.  책은 한글로  가장 오래된 책으로서 태조 이성계의 업적과 세종이전의 역대 조선왕들을 기리는 내용이 실렸다. 권제, 정인지, 안지등이  책의 공동저자들이다. 1449년에는 석가모니의 덕을 칭송하는 [월인천강지곡] 출판되었다.  고서의 출간은 불교에 심취했던 세종에게는 더없는 기쁨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세종 31년에 세종대왕의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1450 2 17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대왕 때의 신하들은 거의 중국의 것만이 최고라고 생각하여 훈민정음에 대하여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드는 것을 거의 기밀로 했죠.

신하들의 억압을 받으면서도 훈민정음을 발포하신 세종대왕님 감사

어쨌든 그리고 세조때는 단지 집현전만 폐지했을 뿐 한글은 계속 썼어요

그런데 연산군 때 자신을 한글로 비방하는 사람이 있자 언문을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는 언문이라고 했음)그리고 문종때도 훈민정음을 썼고 원래는 28자였으나 필요없는 2개를 뺌으로서 26자가 됬습니다.

그리고 원래는 언문이라고 불렸는데 일제 강점기때 우리나라 훈민정음, 즉 국어를 연구하시던 주시경 선생님이 한글이라고 부르면서 그때부터 한글이라 불렸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머리가락으로 만든 용 드레스  (0) 2023.10.24
얼마나 추웠으면  (2) 2023.10.24
브라질 렌코스 마라핸스 사막 해변  (0) 2023.10.23
거꾸로 자라는 고드름  (0) 2023.10.23
연필화 겨울풍경  (0) 2023.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