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선통신 개발자 굴리엘모 마르코니
1901년 발명가 굴리엘모 마르코니가 무선전신기를 이용해 대서양을 건너 최초의 무선 신호를 전송하는 모습. 일부 애호가들 사이에서만 이용되던 무선 커뮤니케이션 붐은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 이후로 일반에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발명가 굴리엘모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 1874~1937)가 1897년 영국 런던에 마르코니 무선전신회사를 설립하고, 1899년 미국 뉴저지 주 트렌톤에 아메리칸 마르코니(American Marconi) 무선전신회사를 설립한 이후 미국의 일부 애호가들 사이에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 무선 커뮤니케이션 붐은 타이타닉호 사건으로 인해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발명가 굴리엘모 마르코니(Lee De Forest, 1873~1961)가 뉴욕 시의 파커 빌딩에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하여 실험 방송을 한 건 19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일반인들이 무선 커뮤니케이션의 위력을 실감한 것은 역시 타이타닉호 사건 직후였다.
당시 아메리칸 마르코니 무선전신회사에 고용된 21세의 데이비드 사르노프(David Sarnoff, 1891~1971)는 타이타닉호의 침몰을 세계 최초로 알리고, 윌리엄 태프트(William H. Taft, 1857~1930) 대통령의 특별한 배려하에 72시간 동안 혼자 교신함으로써 세계적 명성을 얻은 건 물론이고 무선 커뮤니케이션의 가치를 입증하고 홍보하는 업적을 남겼다.
미 의회는 바로 그때에 무선 커뮤니케이션의 ‘교통정리’를 위해 라디오 사용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통상, 노동장관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고 규정한 ‘1912년 라디오법’을 통과시켰다. 또 ‘방송(broadcasting)’이란 단어가 미 해군에 의해 최초로 “명령을 무선으로 한꺼번에 여러 군함에 보낸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도 바로 1912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년 6월~1918년 11월)은 무선전신 사업을 성장산업으로 부상시켰다. 특히 선박, 비행기, 자동차의 송수신에 필요한 진공관의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미국 통신대는 한꺼번에 8만 개의 진공관을 주문하기도 했으며, 이에 따라 아메리칸 마르코니, GE(General Electric), 웨스팅하우스(Westing House) 등 통신 산업체들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전쟁 상황은 무선통신의 실용화를 앞당겼으며 그 기술적 조정자는 미 해군이 되었다. 특히 전쟁 상황이라는 특수성을 내세워 ‘특허’가 무시되었으므로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신속히 확산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자 라디오 방송은 미 해군의 독점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라디오 방송을 국유화시키자는 법안이 해군과 국무성의 주도로 의회에 제출되었다. 미 육군은 라디오 방송을 해군이 관장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긴 했지만, 같은 군부의 차원에서 라디오의 국유화 법안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정부 독점’이라는 데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자, 해군은 차선책으로 군수산업체인 GE의 지원을 받아 해군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민간기업체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를 탄생시켰다
1919년 10월 17일에 탄생된 RCA는 외형상으론 민간 기업체였지만 실질적으론 국영 기업체의 성격이 짙었다. 미국 시민만이 RCA의 이사가 될 수 있고, 외국인은 20% 이상 주식을 소유할 수 없으며, 미정부의 대표자가 이사진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을 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당시 영국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었던 아메리칸 마르코니도 반강제적으로 RCA에 흡수되었으며, 뒤이어 AT&T, UF(United Fruit) 등과 같은 대기업들이 참여하여 이른바 ‘라디오 테크놀로지 개발의 총체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라디오의 전성시
1920년대는 재즈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엔지니어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프레드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 1856~1915)의 ‘과학적 관리법’에 의해 주도된, 효율성을 숭배하는 ‘테일러 혁명’이 지속되면서 엔지니어는 사회적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1922년 미국 고교 졸업반 학생 6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3명 중 거의 1명 꼴로 엔지니어를 가장 선호하는 직업으로 꼽았다. 이는 1930년대까지 지속돼 H. L. 멩켄(H. L. Mencken, 1880~1956)은 [미국 언어(The American Language)](1936년 제4판)에서 미국 국민 전체가 엔지니어가 돼버렸다고 개탄할 정도였다. 매트리스 제조자는 ‘수면 엔지니어’, 미용사는 ‘외모 엔지니어’, 쓰레기 수거인은 ‘공중위생 엔지니어’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엔지니어의 전성시대에 가장 주목을 받은 건 단연 라디오 기술이었다. RCA의 형성에서 소외된 웨스팅하우스는 독자적으로 라디오의 실용화에 골몰한 끝에 1920년 11월 2일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 방송국 KDKA를 개국하였다. 미국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이었다. KDKA는 개국 기념으로 워런 하딩(Warren G. Harding, 1865~1923)과 제임스 콕스(James M. Cox, 1870~1957)가 대결한 대통령 선거 결과를 보도하였으며, 웨스팅하우스 악단을 조직하여 비교적 깨끗한 음질로 음악 방송을 개시하였다. KDKA의 개국 이후 백화점과 전자 상회엔 라디오 수신기를 사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기 시작했다.
KDKA의 음악 방송이 각광을 받게 되자 웨스팅하우스는 RCA 진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 형성된 GE-AT&T-UF-웨스팅하우스 파트너십은 라디오 수신기의 대량생산과 판매를 포함한 이른바 ‘방송 계획’의 추진에 박차를 가했다. 1921년에 라디오 수신기를 소유한 가정은 미국 전체 가구의 0.2%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방송 계획’으로 인해 라디오 보급률은 1925년에 10%, 1927년에 20%, 1929년에 30%, 1930년에 40%, 1931년에 50%를 넘어서게 된다.
1922년 미국 내의 라디오 방송국 수는 570여 개에 이르렀는데, 소유 주체별로 보면 라디오ㆍ전자업체 231개, 신문사 70개, 교육기관 65개, 백화점 30개 등이었다. 라디오 방송국의 수는 많아졌지만, 당시의 방송국 규모나 방송 내용은 전반적으로 매우 원시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주로 노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아마추어ㆍ프로를 막론하고 스튜디오로 몰려들었다. 방송국은 노래가 시원찮으면 방송 도중에 노래하는 사람을 끌어내는 사람을 따로 고용하기도 했다. 노래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출연료를 요구하지 않았으며, 출연 자체를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라디오 방송에 대한 일반인들의 호기심이 차츰 줄어들자 자연히 노래 지원자들도 감소하기 시작했으며, 출연료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1923년 8월 미 법원은 대부분의 라디오 방송국이 백화점에서 방송함으로써 구경꾼이 몰려드는 효과를 거두고 있기 때문에 라디오 방송은 ‘자선용’이 아니라 ‘상업용’이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방송의 근본적인 문제를 부각시켰다. 즉, 방송을 무슨 비용으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당시 미국 라디오 방송계에는 대강 4가지 방안이 제시되었다. ⑴자선기금, ⑵학교나 박물관처럼 정부 보조에 의한 방식, ⑶수신기에 세금을 매기는 영국식, ⑷AT&T의 ‘유료 방송(toll broadcasting)’ 방식 등이었다. 이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그 누구든 전화를 걸듯 스튜디오에 들어가 하고 싶은 이야기나 장기 자랑을 늘어놓되, 방송국은 시설 유지비로 전화 요금을 받듯 방송 이용료를 받는다는 AT&T 방식이었다. 당시 ‘라디오 전화(radio-telephone)’로 불린 이 방식은 초기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제법 큰 인기를 얻게 되었으며, 곧 프로그램과 광고를 구분하여 광고주는 프로그램 제작 비용을 부담하는 대신 ‘광고(ether advertising)’만을 내보내는 방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25년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 1872~1933) 대통령의 취임 연설은 라디오 중계를 통해 1천 5백만 명이 청취하였다. 이 이벤트가 시사하듯, 1920년대 후반은 라디오가 본격적인 대중매체로 성장하는 도약기였다. 1926년 RCA는 당시 매우 인기가 높던 AT&T의 뉴욕 WEAF방송국을 사들여 NBC(National Broadcasting Company)를 출범시켰다. 26개 방송국으로 네트워크를 형성한 NBC는 1927년 1월 ‘red’ 네트워크와 ‘blue’ 네트워크의 2원 체제로 운영되면서 1927년 9월에 탄생한 CBS(Columbia Broadcasting System)와 함께 미국 라디오 방송의 선두주자로 맹활약하기 시작했다.
라디오, ‘전파 프런티어’의 붐을 주도하다
라디오 방송의 활성화에 따라 방송 규제도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1927년 ‘1927년 라디오법’이 제정되고, 이 법에 근거하여 탄생한 FRC(Federal Radio Commission)는 라디오 방송을 관장하는 미 연방정부의 최고 기구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 ‘1927년 라디오법’은 전파는 공중의 소유라는 전제하에 방송국의 등록을 요구하였으며, 방송 검열권은 없어도 면허 갱신을 결정하는 권한을 FRC에게 부여하고, 면허 기준으로는 ‘공익, 편의 또는 필요(public interest, convenience or necessity)’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전파는 공중의 소유’라는 전제는 얼른 보기엔 그럴듯해도, 실제로는 방송 참여의 자격을 자본력을 기준으로 극도로 제한하는 효과를 낳고 말았다. 대자본의 소유자만이 방송 사업에 진출하게 됨에 따라 미국의 라디오는 이미 1920년대 후반부터 철저한 자본 논리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말에는 청취율 조사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프로그램의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텔레비전 기술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던가? 1900년 8월 25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전기기술총회에서 ‘텔레비전(television)’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이래로, 텔레비전은 수십 년간 실험실 속에서만 존재했다. 대자본의 참여를 목마르게 기다리던 텔레비전은 1923년 이젠 RCA의 부사장이 된 데이비드 사르노프가 텔레비전을 라디오처럼 사업적 도구로 만들겠다고 선언하면서 일대 전기를 맞게 되지만, 1920년대는 아직 RCA의 시대는 아니었다.
1920년대 후반, 텔레비전을 실용화하기 위한 독립적인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1925년 6월 13일 찰스 젠킨스(Charles Francis Jenkins, 1867~1934)는 워싱턴에서 5마일이나 떨어진 곳의 움직이는 영상을 전달하는 성공을 거두었으며, 4개월 후 런던에서도 존 베어드(John Baird, 1888~1946)가 비슷한 실험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성과들에 힘입어 1927년 4월에는 뉴욕-뉴저지-워싱턴을 연결하는 텔레비전 실험에서 당시 상무장관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1874~1964)의 축하 메시지를 방송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4월 8일자 <뉴욕타임스> 1면 머리기사 제목은 그때의 감격을 이렇게 전했다. “멀리 있는 연사가 여기서 들릴 뿐만 아니라 보이다: 마치 사진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Far Off Speakers Seen as Well as Heard Here: Like a Photo Comes to Life)”
1928년 1월 GE와 RCA는 텔레비전 수상기 3대를 생산하여 일반에게 공개하였으며, 5월에는 GE의 뉴욕 스케넥터디(Schenectady) 방송국이 1주에 3일간 하루 3분씩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였다. 1929년 가을에는 런던에서도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었으며, 미국에는 이미 26개의 텔레비전 방송국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1929년 10월에 발생한 대공황은 막 일기 시작한 텔레비전 붐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1930년 사르노프가 RCA의 사장이 되면서 NBC도 1932년에 텔레비전 방송국을 설립하였지만 텔레비전은 아직 실험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라디오의 보조 매체에 불과했다. 대공황으로 인해 영화ㆍ연극 관객마저 급격히 줄면서 라디오는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 이후 40여 년간 ‘전파 프런티어’ 붐을 주도하는 전성시대를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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