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주연배우를 희망하여 연출자에게 부탁을 했으나, 외모 경쟁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주연배우들이 감당해야 하는 대본과 연기 과정을 절감, 과감히 생각을 바꾸어 정력적인 배우 활동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1980년대부터는 전두환 군부독재의 3S정책에 항거하여 어용영화는 사절이라며 밤무대에 출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일 세대의 배우들은 이걸 도피성 행위로 간주했고, 이 때문에 배우로서 자격이 없다는 명분하에 영화인협회에서 사실상의 제명에 준하는 취급을 받게 된다.
그나마 1986년에 출연한 깜보와 90년에 개봉된 남부군이 인지도가 있지만, 지난날처럼 영화계 활동이 활발하지는 않았으며, 간간히 주류 영화인들의 작품에 출연하는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본인이 연출에 관여하는 뮤지컬, 기타 방송출연 등으로 활동하며 배우 생활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뮤지컬에서는 칠순이 다 된 몸으로도 녹록치 않은 춤솜씨를 선보여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본업인 영화인으로서 활동의 제약은 끝내 벗어나지 못했고, 게다가 불필요한 구설수에까지 올라 인망에 손상을 입었으며, 설상가상으로 2003년부터 본인 이름을 도용한 인터넷 음란사이트들 때문에 오해를 받게 된다. 2005년부터 음란사이트 업자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법정 투쟁을 했으나, 당시 관련 법률이 없어 업자는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호텔 행사를 마치고 "사회생활 사형선고"로 악명높은 뇌졸중으로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로 투병하다 2010년 작고했다.
사후 장례식에 영화인 협회 누구도 오지 않으며 결국 마지막까지 외면당했다.장례식에는 후배 배우 이효정만 참여했는데, 당시 이효정은 트위스트 김의 장례식에 많은 동료들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상.
예전에 한 말 대로 청바지를 좋아해 자신이 죽으면 반드시 청바지를 입혀 화장을 시켜달라는 말대로 청바지를 입은 채로 입관 해서 화장 절차에 들어 갔으며, 운구는 들 사람 조차 없어서 근처에 있는 취재진들이 운구를 옮겨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