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년 역사를 움직인 10 인의 한국인
1. 광개토대왕
영토 정복 매진한 개혁군주,사상 최대 영토 구축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375~413). 그는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는 사람들에게 가장 자부심을 심어주는 인물이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군사적 영웅으로서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이 한국인에게 자긍심을 심어 주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광개토대왕의 대륙 진출이 지리적으로 반도라는 한민족의 콤플렉스에 대한 보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광개토대왕 때 확대된 고구려의 영토는 어디까지였을까? 고구려의 강역이 가장 넓었을 때는 장수왕(재위 413~491)대다. 이때의 경계는 동쪽이 북간도의 혼춘, 남쪽은 아산만-조령-영일만을 연결하는 선, 서쪽은 요하, 북쪽으로는 목단강 유역의 영안(寧安·寧古塔) 방면까지로 비정된다.
<구당서>에는 고구려의 강역이 '동은 바다를 건너 신라에 이르고, 서북은 요수를 건너 영주에 이르고, 남은 바다를 건너 백제에 이르고, 북은 말갈에 이른다. 동서는 3,100리, 남북은 2,000리'라는 기록과 어느 정도 부합한다고 하겠다.
광개토대왕은 395년 시라무렌강 방면의 거란을 정벌했다. 396년에는 왕이 친히 수군을 이끌고 임진강과 한강 일대에서 백제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고, 400년과 404년에도 신라지역과 예성강 일대에서 각각 왜구를 격퇴했다.
398년에는 현재의 영안 일대로 추정되는 숙신(肅愼)과 토욕혼(吐谷渾)을 점령하고 조공을 받았다. 403년에는 숙군성(宿軍城)을 점령했다. 이 전투 결과는 <자치통감>에 "고구려가 숙군을 공격하니 연의 평주자사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고만 기록돼 있으나, 고구려가 평주까지 진출했다는 서진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기록이. 410년에는 친히 동부여를 재차 토벌해 64성을 격파했다.
광개토대왕은 전방위에 걸쳐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군사적 위상을 아시아 국가들에 인식시켰다. 5세기 후반 북위에서는 주변국 사신의 서열을 정할 때 남제를 제 1위, 고구려를 제 2위로 삼았다. 고구려는 북위·남제와 맞먹는 강국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연호 제정은 천하에 대한 고구려의 자부심을 알게 한다. 연호는 천자만 제정할 수 있는 것으로, 광개토대왕은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이에 따라 영락대왕이라고도 한다. 그에 대한 칭호 '호태왕(好太王)'은 중국의 천자와 당당히 맞서는 존재였다.
광개토대왕은 정복사업과 함께 내치에도 개혁적이었다. 광개토대왕은 자신의 치세 2년, 평양에 9개의 사찰을 설치했다. 광개토대왕은 18세에 왕이 되어 39세로 사망할 때까지 고구려의 영토를 전방위에서 확대해 아시아의 고구려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고구려인이었다. 그의 치적과 함께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점에서 37세에 사망한 알렉산더와 비교하기도 한다.
2.세종대왕
臣民 사로잡은 따뜻한 통치,한글 창제로 文明國家 길 터
돌아선 신민(臣民)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일. 새로 즉위한 세종(世宗·1397~1450)이 해결해야 할 최대 숙제였다.
조선시대 초기 '건국'과 '개혁' 과정에서 나라의 원로들이 소외되자 "지금의 인심은 옛것을 버리고 새것만 취하는 경향이 있다. 자손을 위한 계책도 마련해야겠지만 늙은 자를 버리고 돌보지 않는다면 장차 나라가 어찌 되겠는가"(태종실록 18년5월11일)라는 개탄이 나왔다. 제자가 스승을 죽이라고 탄핵하고(정도전과 이색), 자식이 부왕의 뜻을 저버리는가 하면(이방원과 이성계), 수차례의 형제 간 권력다툼(왕자의 난)까지 불거지자 사람들은 이 '싸가지 없는 정권'의 향방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되는 가뭄과 흉년으로 백성들이 하루 한 끼로 연명하거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흙을 파 떡과 죽을 해 먹는 상황도 시급히 해결해야만 했다. 굶주린 백성은 산속으로 들어가 초적(草賊)이 되거나 집단으로 나라를 떠나기도 했다.
무엇보다 조정 신료들의 침묵과 눈치 보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나라의 희망은 없다는 것이 세종의 판단이었다. "올 겨울은 지나치게 따뜻하다. 날씨가 봄처럼 따뜻해 얼음을 저장할 수 없고, 또 어제는 짙은 안개가 끼어 매우 상서롭지 못했다. 그런데도 아직 과감한 말로 내 허물을 쟁간(爭諫)하는 자가 없으니 이상하지 않으냐."(세종실록 7년 12월8일).
태종이 사망한 지 3년이 지났지만 태종 통치하에 형성된 관료들의 복지부동은 변하지 않았다. 하기는 말 한마디 잘못하면 온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살벌한 시대를 산 그들에게 쟁간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이 첫 번째로 취한 조치는 회의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었다. 즉위한 지 사흘 만에 세종은 "내가 인물을 잘 알지 못하니 좌의정·우의정 등과 함께 의논해 벼슬을 제수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도승지 하 연은 "전하께서 초정(初政·첫 번째 정사)을 의논으로 시작하신다니 매우 다행입니다"라며 환영한다.
당시 이미 22세의 나이였고, 또 학문이나 정치적 경륜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던 세종이 '인물을 잘 알지 못할' 리는 없고, 아마도 정치란 왕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이론과 현실이 다르다는 인식에서 나온 말인 듯하다.
세종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직언'을 요청했고, 말끝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때로 논전(論戰)과 '끝장 토론'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를 당시 사람들은 "토론을 즐겨하는(樂於討論) 군주"라고 불렀다. 세종시대의 수많은 업적과 성대한 인물들은 바로 이런 회의 분위기에서 나왔다. 신분을 초월해 인재가 천거되고, 그 인재들이 사명감을 갖는 것은 바로 회의 안에서였다. 이런 회의를 거쳐 세종이 육성한 100여 명의 집현전 학사는 새 왕조의 예제와 법전을 마련하는 한편, 민생을 돌보는 순량한 관리가 됐다. 조선 왕조가 민심의 기반 위에 선 안정적 국가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3. 정약용 (茶山)
역사상 최다 논저 집필,다산 연구가 곧 조선사 연구"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조선 후기의 위대한 학자다. 그는 실학의 집대성자이자 사회개혁가였고, 방대한 유교 경전을 망라해 해석한 유교 역사상 드문 경학가였으며, 어문·역사·지리·과학·의학·예술 등 학문 전 분야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긴 박학(博學)의 학자였다.
초등학생도 제목을 아는 대표 저서 <목민심서>는 일찍이 동학 농민군이 얻었다는 '구세(救世)의 비기(秘記)'라는 전설을 남겼으며, 고종에게도 올려졌고, 베트남의 민족지도자 호치민의 애독서였다. 아직도 완역되지 못한 500여 권의 <여유당전서>는 깊은 사색과 수많은 정보가 담긴 바다와도 같아, 단언컨대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논저가 그에 대해 이루어졌다.
일찍이 정인보 선생이 "다산 연구는 곧 조선사 연구요, 조선 근대 사상 연구"라고 정리했듯, 다산의 사상은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자유주의자 등의 모든 개혁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2007년, 그는 자유자재의 지식경영법을 운용한 신지식의 표상으로도 읽힌다.
다산은 실학, 그 중에서도 남인(南人) 실학의 지식 전통에 서 있었다. 남인 실학은 성호(星湖) 이 익(李瀷) 이래 토지와 사회제도 개혁을 통한 이상사회 구현에 관심을 기울였다. <여유당전서>의 절반을 차지하는 경학(經學, 유교 경전 해석학)의 궁극적 지향 역시 토지공유(土地公有)에 기반한 정의로운 공동체 구현이었고, 지고한 도덕적 존재의 현현(顯現)을 통한 지배층의 각성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당대의 기성 유학, 곧 성리학을 질타한 '유학의 근본주의자'였다.
넓게 보면 다산은 유학자였지만, 그는 딱히 유학의 틀 안에만 갇혀 있지도 않았다. 18년의 유배생활은 전도양양했던 고위 관료가 백성의 삶에 깊게 다가가 휴머니스트로 거듭나는 계기였다. 민초의 고통, 그리고 그 너머의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고발은 당대의 어떤 기록과 문학보다 생생하며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저민다.
연민의 폭이 깊은 만큼, 그의 개혁책은 누구보다 치밀하고 웅장했다. 그것은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생히 보여주었다. 인애(仁愛)에 기반한 휴머니즘 정신이야말로 그를 오늘도 생동하게 하고 있다.
휴머니즘에 기반한 실천하는 양심으로 다산은 시공을 초월한 스승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개별 학문, 즉 각론(各論)이 갖는 현재성의 문제는 남는다. 그의 학문적 성과는 1930년대 국학(國學)운동의 도화선이 된 이래 전근대와 근대를 연결하는 가장 든든한 다리였다. 하지만 근대 담론이 100년을 넘어 그 한계가 또렷해지는 지금, 그의 각론에서 근대성을 추출해 왔던 방식은 개선의 여지가 없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가 이룩한 지식 혹은 가치의 통합 방식을 재음미할 시점이다. 그것은 근대 한국학이 소홀했던, 개인과 객관 사물의 조화에서 출발했던 전근대 사유를 되살리는 과정이며 전통과 근대를 넘는 새 가치론의 모색이다.
다산이 훌륭하게 구현한 각론과 총론의 조화는 그래서 현재도 진행 중이다.
4. 박정희
세계 경제 11위 국가 초석 다진,CEO형 대통령
박정희(朴正熙·1917~1979) 전 대통령은 공과(功過)가 뚜렷한 인물이다. 때문에 박 전 대통령 시대를 재조명하는 일은 현 정부 들어 진행된 각종 과거사 논쟁에서도 정점에 해당한다.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것은 분명한데, 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독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가 문제다.
논란은 거듭되지만 답은 잘 안 나온다.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면 '소유냐, 존재냐'의 논쟁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절대 빈곤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시급했느냐, 인간으로서 삶의 장치를 갖추는 것이 먼저였느냐는 질문에 답은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 전 대통령은 그해 7월 경제기획원을 설립해 산업구조 고도화와 수출 증진을 위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다. 경제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산업금융체제를 강화하고, 수출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각종 수출금융과 수출지원 체제를 정비했다. 1970년대에는 유가 상승으로 물가 불안이 심화하는 가운데 중화학공업 정책을 추진해 고도성장 기조를 유지했다.
이런 성장정책으로 박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를 절대 빈곤에서 탈피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1인당 국민소득을 명목소득으로 계산할 때 박 전 대통령이 집권했던 1961년 82달러에서 1979년 1,636달러를 기록해 무려 연평균 18%의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특히 수출은 연평균 38% 증가라는 경이적 기록을 이룩했다.
때문에 '개발독재 불가피론'을 펴는 보수적 시각에서는 1960~70년대 우리나라가 이룩한 경이적 경제성장이 박 전 대통령 개인의 탁월한 능력과 함께 '독재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개인의 능력과 관계없이 한국경제는 성장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며 독재의 폐해를 지적한다. 박 전 대통령이 이룬 경제성장의 업적은 노동자의 희생과 인권침해, 천민자본주의의 폐단과 부작용을 낳았다는 것이다.
최근의 추세는 박 전 대통령의 공과 중에서 'CEO 박정희'는 인정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는 듯하다. 그동안 박 전 대통령 평가에 인색했던 진보학계에서조차 그런 움직임이 포착될 정도다.
진보 진영의 대표적 원로학자 백낙청 교수는 2005년 계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서 "경제성장을 이루지 못한 다른 나라 독재자가 많다는 점과 한국처럼 극적인 성장을 이룩한 일은 더욱 드물다는 점에서 박 전 대통령을 경제성장의 유공자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민주화 진영이 박정희 개인이나 그 시대 경제분야에 대해 소홀한 면이 있었다"며 "전제적이고 포악했지만, 유능하고 나름으로 헌신적이었던 '주식회사 한국'의 최고경영자(CEO) 박정희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정해 주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 향수야말로 박정희 시대 최악의 유산"이라고 덧붙였다.
박 전 대통령은 쿠데타를 통한 집권과 철권 통치, 경제 기적이라는 양면성을 극명하게 지니며 우리 사회 모순과 함께하고 있어 평가가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그의 문제점이 현재까지 우리 사회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역사의 인물인 동시에 현재의 인물이기도 하다.
5. 김옥균
쇄국 빗장 풀고 개혁·개방 선도한 시대의 풍운아
열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남을 묘책은 무엇일까? 한 세기 전 풍운아 김옥균((金玉均·1851~1894)을 고뇌하게 한 화두는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과제는 제국주의 열강 침략을 막고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일본이라는 외세에 기대고 무력에 호소하는 유혈 쿠데타라는 수단으로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려고 했으며, 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후 동아시아 3국이 힘을 모아 서구의 침략을 막자는 '삼화(三和)주의'를 제창한 바 있다.
오늘 우리 지식사회는 세 가지 해법을 내놓는다. 한국사학자들은 제국과 당당히 맞설 민족을 단위로 하는 자주적 국민국가의 완성을, 경제사학자들은 제국과의 타협을, 그리고 서양사학자들은 유럽공동체(EU) 같은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시대를 앞서 이를 먼저 고민했던 김옥균은 분명 선각자다.
그러나 국민을 단위로 한 국민국가를 세우려고 했으면서도 제국과 타협하려 했으며, 민족을 넘어 일종의 동아시아 공동체도 모색했던 이중성과 모호함이 그에 대한 평가를 어렵게 만든다.
따라서 그만큼 시대와 지향에 따라 긍부(肯否)가 엇갈리고 호오(好惡)가 교차하는 역사적 인물도 드물다. 정변 동지 서재필은 그를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을 힘 있는 근대국가로 만들기를 절실히 바란" 위인으로 기억하지만, 정변에 불참한 윤치호는 "위로 나랏일을 실패하게 하고, 아래로 민심을 흔들리게 한 경망스러운" 인물로 깎아내린다.
그와 동시대를 살고 생각을 함께한 개화파 인사들의 평가가 엇갈릴 뿐만 아니라 항상 같은 내용이었을 것 같은 북한학계의 평가도 늘 변해 왔다. 주체사상이 대두하는 1950년대 중반을 경계로 그에 대한 평가가 '친일주구'라는 악평에서 '부르주아 개혁운동을 주도한 혁신관료'라는 찬탄으로 뒤바뀌었으니 말이다.
오늘 우리 학계의 김옥균관도 평자가 서 있는 곳과 지향하는 바에 따라 서로 충돌한다. 남의 국민과 북의 인민이 하나 되는 민족을 단위로 한 국민국가의 완성과,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가슴에 품은 한국사학자들은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려 했던 그의 이상에는 공명하되 일본에 의존하고 민중의 힘을 도외시한 그의 전략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이처럼 김옥균에 대한 기억의 편차가 크다는 것은 갈가리 나뉜 우리 사회의 난맥상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면 다원화한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재는 시금석일 수도 있지 않을까?
6. 서희
전쟁은 심리싸움!세치 혀'로 1백만 거란군 물리쳤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외교는 굴절로 얼룩져 있다. 사대와 자주의 틈바구니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외교 논쟁을 거듭한 것이 그것이다. 최근 벌어진 '친중외교'와 '친미외교'의 대결은 소위 '자주외교' 논쟁을 파생시켰고, 그 사이에서 등장한 '동북아 균형자론'을 둘러싼 공방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중국·일본과의 역사논쟁까지 가세하면서 한국 외교는 내부적으로 끝없는 논쟁에 휘말리는 모양새다.
이럴 때마다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고려 초 거란의 침략을 받아 국가 존망이 불확실할 때 외교적 수완으로 적을 물리친 것은 물론 오히려 영토를 확대하는 성과를 이룬 서희(徐熙·942~998)가 바로 그 주인공.
고려 건국 이후 최대 위기는 발해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의 패자가 된 거란이 8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는 데서 시작됐다. 조정에서는 아연실색해 싸워 보지도 않고 땅을 떼어주고 화친하자는 주장이 대세였다. 그러나 서희는 혼자 적진으로 들어가 적장 소손녕과 담판해 군대를 물리게 했다. 그야말로 '세 치 혀로 백만 대군을 물리친' 경우다.
그러나 서희가 오로지 '세 치 혀'만으로 적을 물리친 것은 아니다. 그가 담판을 이룰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보다 당시의 전세와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이해였다.
우선 당시 중요한 전술상의 변화가 발생했다. 안융진 전투 이후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진다. 고려군의 검차
앞에서 거란의 기마군이 맥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기마부대를 이용한 속도전과 광활한 대지에서의 싸움에 익숙한 거란의 전술이 산악지형인 고려에서 통하지 않자 소녕은 초조해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당시의 국제정세였다. 거란이 서희의 제안을 물리치지 못한 이유는 송나라와의 대립관계 때문이었다. 그 전에도 거란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 때를 틈타 송이 여러 차례 거란을 공격한 적이 있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 목적이 고려와 친교해 송을 견제하는 데 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우리 역사상에는 당시와 아주 흡사한 경우가 또 있었다. 조선 중기 인조 때 일어난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명을 공격하려던 신흥세력 청은 후방의 안위를 걱정해 대군을 몰아 조선을 침공한다. 이 같은 정세를 미리 파악했던 광해군은 양국 간의 이해를 이용해 국가의 안위를 지켜나갔지만, 쿠데타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인조 대의 유신들은 태생부터 유교적 명분론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주전파와 주화파가 나뉘어 논쟁 끝에 주전파가 득세해 전투에 임했지만 결과는 '삼전도의 굴욕'으로 끝나고 말았다.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은 뒤에도 고려는 송과 문화적 교류를 끊지 않았다. 송 역시 고려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는 고려와 거란·송이 팽팽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국제관계 속에서 힘의 균형을 이용해 실리외교를 편 서희의 담판은 강대국 사이에서 고도의 외교 전략을 필요로 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두고두고 반추해야 할 역사적 교훈이다.
7. 이건희
반도체 왕국 건설 주인공,위기 때 빛 발하는 10년 예지력
우리에게는 서구에서 말하는 산업혁명 과정이 없다. 그래서 핵심 기술과 소재 등 대부분을 수입해 산업화를 시작했다. 그 결과 항상 선진국을 따라잡기에 바빴고, 한편으로 후발주자에게 덜미를 잡힐 우려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반도체에 이르러 말은 달라진다. 메모리칩 분야에서 15년째 1위. 이는 1970년 인텔사가 1K D램을 개발하면서 시작된 메모리산업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사례로 기록돼 있다. 역사 이래 대한민국발 그 어떤 성과도 이를 능가할 수 없다는 평가도 나왔다.
1983년 2월8일 이병철(1910~87) 삼성 회장은 삼성그룹이 반도체 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겠다는 내용의 '도쿄 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이 회장은 64K D램 기술 개발에 착수하겠다는 구체적 계획까지 내놓았지만 국내외의 반응은 1974년 삼성이 한국반도체를 인수할 때처럼 냉소뿐이었다.
그러나 도쿄 선언 10개월 뒤인 1983년 12월 삼성은 전 세계 반도체 업계를 충격에 빠뜨리는 발표를 내놓는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해낸 것. 세계 반도체 업계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로서는 '꿈의 기술'이라던 64K D램을 독자기술로 개발해냈기 때문이었다.
10여 년 뒤인 1992년, 이병철 회장의 셋째 아들로 삼성 회장직을 이어받은 이건희(1942~ ) 회장은 다시 한번 세계 반도체 업계를 경악하게 하는 발표를 했다. 세계 최초로 삼성전자가 8인치 웨이퍼 투자를 결정했던 것. 일반인에게는 낯선 이야기지만 8인치 라인 가동은 1993년 삼성이 마침내 메모리칩 업계 세계 1위에 올라 올해까지 15년째 부동의 세계 1위를 고수하는 시발점이었다.
삼성의 임직원이 반도체 세계 1위를 자축하며 샴페인을 터뜨리던 1993년 2월, 이 회장은 갑자기 삼성전자 사장단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불러모았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해 독일 프랑크푸르트-일본 오사카-영국 런던으로 잇는 4개월여에 걸친 대장정에서 연인원 1,800여 명의 임직원을 해외로 불러들였고 장장 500여 시간 열변을 토했다. 1987년 회장 취임 이후 '자율경영'을 강조하며 '은둔의 경영자'로 여겨지던 그로서는 전에 없던 파격이었다. 당시 그의 강연을 들었던 삼성 임직원들은 "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다"고 회고한다. 평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보다 상대방 의견을 듣는 데 열중하던 이 회장의 스타일과는 뭇 달랐다는 것.
대장정의 끝자락인 1993년 6월7일, 이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했다. 선친인 고 이병철 회장의 '도쿄 선언'이 있은 지 꼭 10년 만이었다. 당시 그는 이 선언을 통해 "삼성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며 강력한 개혁을 요구했다.
반도체 세계 1위에 오른 상황임을 감안하면 다소 의아한 주문이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이 회장은 "세기말적 변화를 앞두고 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초일류 기업과의 경쟁에서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다른 기업들이 거품경제의 환상에 매료돼 5년 후 다가올 외환위기의 대재앙을 상상조차 못하고 있을 때 이 회장은 삼성을 살려낼 방주를 주조하기 시작한 셈이었다.
이제 세계시장에서 '반도체=삼성'의 등식은 일반화됐다. 뿐만 아니라 삼성이 세계 1등인 것은 컬러TV·LCD모니터 등 무려 10여 개에 달한다. 한국의 1등을 명실공히 세계의 1등으로 만든 삼성 이건희 회장의 행보가 여전히 주목되는 것은 앞으로 새롭게 등장할 1등에 대한 궁금증을 계속 던지고 있기 때문 아닐까?
8. 장영실
노비에서 당대 최고 발명가로, 과학기술의 상징
조선 왕조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세종의 시대를 과학기술문화를 가장 찬란하게 꽃피운 시기로 꼽는다. 심지어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이때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이 '특기할 정도로 뛰어났다'고까지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조선 초기의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장영실(蔣英實·생몰연대 불확실)이다. 그의 선조는 중국의 소·항주(蘇·杭州)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해 대대로 군기시·서운관 등 과학기술과 관련된 직책에 복무했다.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蔣成暉)는 고려 말 전서(典書)를 역임한 관리였으나 어머니는 기녀였다. 그런데 어찌 된 연유인지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官奴)로 있었다.
그렇지만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일찍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냄으로써 태종 때부터 중앙으로 차출돼 활동하기 시작했다. 1421년에는 세종의 특별 배려로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이천 등과 함께 천문관측기구의 제작에 참여해 두각을 나타냈다. 그렇지만 장영실의 진가는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제작 과정에서 발휘되었다. 자격루는 다른 기구들과 달리 매우 복잡한 기계였음에도 장영실은 자신의 책임 아래 세종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단기간에 완성했다. 이에 세종은 그를 호군(護軍)으로 승진시켰다. 이어 장영실은 자격루보다 더 정교한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제작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것으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해야 할 농사일까지 알려주는 다목적 시계였다.
뿐만 아니라 장영실은 금속 채굴과 제련 관련 분야에서도 많은 활약을 했다. 지방으로 파견돼 청옥·동철과 연철의 채굴 작업을 감독했다. 또한 1434년에는 중국인 김새(金璽)로부터 금속 제련 기술을 전수받아 갑인자 주조 사업에 핵심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금속활자 주조 기술의 발달에 이바지했다. 이러한 공로로 늦어도 1438년 이전에 대호군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세종 24년(1442) 그가 제작을 감독했던 임금의 '안거(安輿·임금의 수레)'를 세종이 타고 온천욕을 위해 경기도 이천으로 가던 도중 부서진 사건으로 직첩을 회수당하고, 장형(杖刑)을 당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장영실의 등장과 퇴장은 당시 조선사회의 역동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노비 출신의 그가 관리로 발탁된 것은 신분적 자격보다 업무 능력과 경험을 더 중시했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건국 초기에 국가의 통치체제를 새롭게 정비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느 전통적 문반 출신의 사족(士族)들과 달리 그의 업적은 자손들에게 계승되지 못했다. 이는 문반 중심의 신분질서를 존중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9. 이승만
'대륙풍' 차단, 해양문명권 편입 시도한 현대판 문명 개화파
이승만(李承晩·1875~1965)이 한민족에게 기여한 사실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를 국가사적·민족사적 관점보다 거시적인 세계사적 관점 또는 문명사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승만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는 오늘날 전 지구적(globalist) 차원의 '문명충돌'이 일어나는 시대에 비추어 볼 때에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계주의'가 막 시작되던 1945년 이승만은 한국인들을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으로부터 떼어내 '현대판 로마제국'인 미국 중심의 해양문명권에 편입하는 '문명사적 전환'을 주도했다. 한국인의 문명권 소속을 바꾸려는 혁명적 시도였다.
그는 새로운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세계적 표준에 맞도록 한국인들의 수준을 높이기에 앞서, 자신부터 그 수준에 맞추었다. 그래서 그는 배재학당에 이어 조지워싱턴·하버드·프린스턴대학을 거치면서 최고 교육을 받고, 세계어인 영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그 결과 그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최초의 한국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것은 그가 유학생 자격으로 미국 땅을 처음 밟은 1904년부터 하와이에서 죽은 1965년에 이르는 동안 <뉴욕타임스>에만 실린 그의 기사가 무려 1,256건에 이른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대한민국 땅이 '팍스 아메리카나'로 편입되는 과정은 아주 힘든 것이었다. 오랫동안 공동체주의적이고 관념주의적인 '중국적 생활방식'에 젖어 있던 한국인들에게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주의적인 '미국적 생활방식'은 낯설었다. 그 때문에 폭동, 정치파동, 6·25전쟁과 같은 수많은 진통이 따랐다.
그럼에도 1953년의 한미동맹 결성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해양문명권 편입은 확실해졌다. 또 그것을 토대로 하여 한국은 60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연간 국민소득이 35달러에서 2만 달러 가까이에 이르는 눈부신 발전을 했다.
'미국적 생활방식'인 자유민주주의의 정착은 이승만이 자유주의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려는 의지 때문에 가능했다. 6·25전쟁의 극한상황에서도 그는 선거를 중단하지 않았고, 국회를 해산하지도 않았다. 대통령 직선제를 포기하지도 않았고, 헌법을 정지시키지도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이승만은 야당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민주당이 자유당과 함께 양당제도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흥사단계의 <사상계>와 한민당계의 <동아일보>가 그의 통치를 맹렬히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언론 자유를 허용했다.
1960년의 4·19 혁명은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 철학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국민들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소"라는 그의 하야 선언은 평생 민주주의를 신봉하던 청년 이승만의 이상 그 자체였다. 또 한 국가의 지도자가 물러날 때 어떻게 처신해야 명예로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국내가 아닌 하와이로 거처를 옮긴 일 역시 국민들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승만이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남겨 준 과제는 대한민국 땅이 다시 대륙문명권으로 되돌아가지 않게 막는 동시에, 여전히 대륙문명권에 붙어 '현대판 위정척사파'의 노선을 따라가고 있는 북한 땅 해양문명권에 편입시키려는 '현대판 문명개화파'의 역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10. 백남준
'비디오아트'로 서구 우월주의에 맞섰다
백남준(白南準·1932~2006)은 시대를 50년쯤 앞서 살다 간 위인이다. 지금은 현대미술에서 당연시하는 '과학과 미술의 만남'을 이미 반세기 전에 시작했으니 말이다.
백남준이 떠나고 없는 이 시대, 포스트 백남준의 예술적 계보를 누가 잇는가가 세계 미술계의 뜨거운 이슈다. 그만큼 그의 족적은 깊고 넓었다. 그는 국내 작가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 박현기에서 출발해 김해민·이원곤·오경화·김영진·홍성민·육근병 등으로 이어지는 비디오아트의 계보는 백남준이 첫 단추를 끼워 짜인 것이다. 이들 한국의 후배 작가들에게 백남준은 심적 물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강익중 같은 뉴욕 거주 작가들은 백남준을 영원한 정신적 지주로 여길 정도다.
백남준은 '전 세계에 통하는 브랜드'를 확실히 구축한 거의 유일한 한국 출신 예술가다. 국제무대에서 남의 눈치 안 볼 만큼 독창적 세계를 쌓은 그에게는 늘 '비디오아트의 선구자' '전위음악가'라는 칭호와 함께 '동양에서 온 테러리스트'라는 별칭이 따라붙고는 했다. 이는 그에게는 훈장이나 다름없다.
서구예술의 우월주의에 맞서 '백남준표 아트'를 밀고 나간 그는 한국문화의 가능성을 낙관했다. 또 "선진국을 따라가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며 그 자신 '코리아니티 경영'을 보여주었다. 한국적 순수성을 간직한 채 국제 예술세계에 뛰어들어 테크놀러지의 예술성과 조우하고 '비디오아트'라는 신영역을 창조했다.
비디오아트를 전개해 가는 과정에서도 '거북선' '한국의 방' '종로구' '눈먼 부처' 등 다양한 주제를 통해 한국적 상상력을 아낌없이 펼쳐보였다. 생각과 시도가 막힘 없이 늘 뻥 뚫려있던 그는 이질적인 것을 모아 또 다른 것을 만드는 한국의 비빔밥과 남대문·동대문시장이 있는 한 한국은 문화강국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백남준의 일생은 진부한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과정이었다. 그에게 낡은 규칙은 의미가 없었다. 진정한 예술을 위해 기존 규칙은 파괴하고 해체할 대상이었다. 1967년 뉴욕에서 샬럿 무어맨과 섹스를 음악으로 표현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 대해서도 "섹스는 미술과 문학의 지배적 테마인데 왜 오직 음악에서만 금지되는가"라고 반문했다. 일상 자체가 예술이었던 그는 "욕을 먹어야 예술이 강해진다"며 기행(奇行)을 선보이기도 했다.
백남준의 작품세계는 또한 복합성을 기조로 한다. 한 가지 매체나 장르에 정착하지 않는 그의 방랑적 습성은 행위음악에서 해프닝으로, 해프닝에서 비디오로, 비디오 분야에서도 조각·설치·퍼포먼스·위성중계 등 비디오로 가능한 모든 지대를 섭렵하게 했고, 마침내 레이저아트까지 선보이게 했다.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서 끊임없이 복합성을 추구했던 그는 듣는 음악을 보는 음악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행위음악을 고안했고, 인터미디어 감수성으로 행위음악을 해프닝에 접목했다.
남다른 혜안과 용기로 미래적 비전을 제시하며 '포스트모던 시대의 비저너리'의 길을 걸었던 백남준은 10여 년의 투병 끝에 결국 우리 곁을 떠났다. 한국인이자 세계시민이었던 백남준. 그는 이제 천상의 세계에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끈질기게 도전하고, 상상의 나래를 마구 펼칠 것을 권하고 있다.
'역사 문화 세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덕종어보 귀환' (0) | 2023.09.08 |
---|---|
위안부 할머님의 고백 (0) | 2023.09.07 |
한국에서 못세운 박정희 기념비, 독일에서 세운다 (0) | 2023.09.07 |
대마도 반환하라” 이승만, 日에 요구 (0) | 2023.09.05 |
일본이 약탈해간 우리나라 보물들 (0) | 2023.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