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영조는 “40km 지점의 철교 아래 S자 오르막이 좀 걸리지만 2위 하퍼를 87초(약 400여m) 거리로 떨어뜨린 상황에선 큰 문제가 안 된다”고 말했다.
손 선생은 10km 지점 5위(34분 10초), 25km 지점 3위(1시간 24분 49초)로 가다가 마침내 28km 지점에서(1시간 35분 29초) 선두 자바라를 32초차로 따라붙었다. 거리로는 약 150m. 손 선생은 내친김에 29km 지점에서 자바라를 제쳤고 31km 지점에선 끈질기게 따라붙던 영국의 하퍼를 16초차(75m)로 제치고 단독 선두에 나섰다.
황영조는 “난 바르셀로나에서 29km 지점부터 일본의 모리시타를 떨어뜨리려고 10여 번쯤 스퍼트를 했는데 그때마다 이 친구가 물귀신처럼 달라붙어 정말 혼났다”고 말했다. “결국 40km 몬주익 언덕에서 죽을힘을 다해 마지막 스퍼트를 했는데 그때 모리시타가 또 따라붙었다면 아마 내가 먼저 포기했을지도 모른다”며 웃었다.
손 선생은 마지막 100m를 15초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이는 손 선생의 100m 평균 21.23초(우승기록 2시간 29분 19초)보다 6.23초 빠르게 달린 것. 생전 손 선생은 “10만 관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누가 꼭 등 뒤에서 따라오는 것 같기도 했고. 당시엔 뒤를 돌아보면 실격은 아니지만 정당하지 못하다고 손가락질 받기 때문에 달리면서 뒤를 돌아볼 수가 없었거든”이라고 말했다. 당시 손 선생이 신고 뛰었던 신발은 엄지발가락과 4개의 발가락 사이가 갈라진 형태. 일본이 나름대로 고안한 특수 신발이었지만 손 선생에게는 잘 맞지 않았다. 골인하자마자 신발부터 벗었지만 발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스타디움 시상대 위에서 태극기 밑에 일장기(2위 모리시타)와 독일 국기(3위 슈테판 프라이강)가 오르는 것을 보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이 떠올랐습니다. 당시 우리 민족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일제와 히틀러의 독일이 이런 식으로 업보를 받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황영조는 시상식이 끝난 후 스탠드에 있는 손기정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다. 손 선생은 황영조의 손을 부여잡고 “더는 여한이 없구먼. 이제는 맘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아”라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황영조는 “할아버지가 생전에 나와 손잡고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의 트랙을 꼭 달려보자고 했는데 내가 게을러 너무 늦게 왔다”며 “오늘 코스를 도는 내내 ‘나라 없는 백성은 개와 같다’는 할아버지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고 눈물을 글썽였다.
올림픽 남자마라톤에서 아시아인이 우승한 것은 손기정 황영조 단 두 사람뿐. 하지만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 새겨진 우승자 명단엔 손 선생의 국적이 여전히 일본으로 표시돼 있다. 오죽했으면 1970년 8월 16일 새벽, 당시 신민당 국회의원 박영록 씨가 스타디움에 몰래 들어가 끌과 정으로 5시간 동안 작업 끝에 ‘JAPAN’을 ‘KOREA’라고 바꿨을까. 그러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총리 빌리 브란트가 이끌던 서독정부는 “국적 변경은 불가능하다”며 다시 ‘JAPAN’으로 환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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