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9월 16일 일본 대심원(현재의 최고재판소 한국의 대법원에서 첫 공판이 열리고 1932년 9월 30일 오전 9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죄명은 대역죄(大逆罪)로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당시 그의 나이 향년 32세였다.
의거 이후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자들은 조선의 친일파였다. 재일 친일파의 대표격인 박춘금은 1월 8일 궁내성을 비롯하여 여러 일본 고위층 인사들을 방문해 불경범인이 조선인인 것에 대해 송구스럽다며 사죄를 했으며 9일에는 친일단체 120명을 소집해 궁성 입구에서 또 직접 사죄를 했고 국내의 친일 세력들은 1월 9일 서울의 요정 식도원에 모여 이봉창 의거에 대해 사죄하기로(매일신보 1932년 1월 10일자)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저 사건을 자신들이 했다고 알렸는데 그 결과 일제의 감시 때문에 각종 지원이 끊겨서 김구가 그림을 그려 팔며 힘들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운영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반전된 것은 윤봉길의 의거 이후로 윤봉길의 의거에 감명을 받은 장제스의 지원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회생의 길을 얻고 남경중앙군관학교 분교에 조선인 훈련반도 보내고 돈을 지원받아서 보내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일본 본토의 고위 관료들에게는 이 사건은 재앙이었다. 실권이 전혀 없는 지금도 극우파에게 만세일계 소리 들으며 숭배받는 존재가 바로 천황인데, 하물며 서슬 퍼런 제국 시절 천황의 상징성이나 위치는 당연히 지금과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런 절대권위의 천황이 암살당할 뻔했으니 발칵 뒤집힌 건 당연지사. 당시 수많은 고위 관료들이 책임을 통감한다며 자진 사퇴하고 해임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이자 순국이지만 저들 입장에서는 중대한 보안사고나 다름없었으니...
다만 일본의 공판 기록에 따르면, 이봉창은 이후 쇼와 덴노의 암살 시도에 대해 반성하는 발언을 남겼다. 심문에서 그는 자신이 불교에 심취했음을 밝혔고 김구의 사주를 받아서 난폭한 짓을 벌였다고 술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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