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수 신카나리나 별세
신카나리아의 본명은 신경녀(申景女)이다. 1912년 10월 26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원산의 원산루씨고등여학교 1학년을 다니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다. 우연히 나간 교회에서 목사의 자녀였던 성악가 남매 이인범, 이인근, 이옥현을 만났고, 이옥현에게 성악지도를 받았다. 16세가 되던 1932년, 극작가 임서방이 이끌던 악극단 '조선예술좌'에 입단하며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맑고 깨끗한 음색과 귀여운 외모에 호감을 느낀 임서방은 '신카나리아'라는 예명을 지어 주었고, '신무대악극단'의 악극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막간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다.
1933년 <뻐국새>와 <연락선> 등의 노래를 발표하며 데뷔했지만, 오히려 악극단의 막간 무대에서 부른 이정숙의 노래 <강남달>, <강남제비> 등이 크게 인기를 얻었다. 스무살이 넘어서면서 시에론레코드사, 빅타레코드사, 리갈레코드사 등과 전속계약을 맺고 많은 노래들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가수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녀를 대표하는 노래 <나는 열 일곱 살이에요>를 비롯해 <사랑아 곡절 없어라>, <뻐꾸기>, <선창의 블루스>, <무궁화 강산>, <월야의 탄식>, <꽃이 피면>와 같은 노래들이 히트했다. 특히 <무궁화 강산>은 해방 이후 <삼천리 강산, 에헤라 좋구나>로 제목을 바꿔 다시 불러 크게 인기를 얻었다. 신카나리아를 가수로 이끌어 주며 매니저 겸 후견인으로 활동하던 임서방과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1940년대 이후에는 음반보다 악극단 공연무대에서 더욱 활약하였는데, '신태양악극단', '라미라악극단', '포리도루실연단', 'KPK악극단' 등에서 무대에 섰다. 이 무렵 임서방과 이혼하고 극작가이자 영화감독인 김화랑(본명 이순재)과 재혼하였는데, 부부가 함께 '새별악극단'을 창립하여 지방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1970년대 회갑을 넘긴 신카나리아가 서울 충무로에 문을 연 '카나리아 다방'은 옛 동료 가수들의 사랑방이었다.
신카나리아는 간드러진 음색과 단정한 한복차림의 '영원한 소녀가수'로 불리며, 아흔이 넘는 나이까지 원로 가수로 무대에서 노래했다. 대한가수협회 부회장, 원로연예인 상록회 최고위원 등을 역임했고, 이난영, 황금심 등과 함께 우리나라 1세대 여가수로 가요계 발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문화체육부장관상(1997)과 문화포장(1998) 등을 수상했다. 2006년 11월 24일 노환으로 향년 9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