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석 신부 이야기
내전 중이던 아프리카 수단에서 의료 선교를 하다가 숨진
고(故) 이태석(1962~2010) 신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를 제작한 구수환(KBS 책임프로듀서) 감독도,“이 영화를 찍으면서 많이 울었다.
25년간 방송 생활하면서 이렇게 많이 울어본 적이 없었다.
각박한 시대에 따스함을 주는 영화가 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영화는 가수 심수봉의 노래 ‘그때 그 사람’으로 시작했다.
생전의 이 신부가 색소폰으로 그 곡을 연주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그랬다.
영화 속 사람들도, 영화 밖 사람들도 그 선율을 따라가며
그때 그 사람, 이태석 신부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모두 울었다.
이 신부는 2001년 로마 교황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자청해,아프리카 수단으로 갔다.
내전 중인 남수단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지역이었다.
그곳을 자원하는 성직자는 거의 없었다. 거기서 이 신,부는 헐벗고,굶주리고, 다치고, 병에 걸리고, 희망을 상실한 주민들
에게 의술과 예술,따뜻한 가슴을 베풀었다. 그리고 올해 1월 14일
대장암으로 선종했다.48세의 젊은 나이였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수단의 슈바이처’라고 부른다. 이국 땅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하다 숨을 거두었으니 붙여준 형식적인 수식어가 아니다.
영화에는 이태석 신부가 톤즈의 배고픈 아이들, 밤낮 사흘간 걸어
서 찾아온 환자들, 수단인조차 외면하는 한센인을 바라보는 선한 시,선과 해맑은 미소가 장면마다 배어난다.이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워낙 가난하니까 여러 가지 계획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저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진정한 선교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묵상케 하는 대목이다.
이 신부의 고향은 부산이다.
어머니는 자갈치 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10남매를 키웠다.
어릴 적, 집 근처의 성당은 그에게 놀이터였다.
거기서 벨기에 출신인 다미안(1840~1889) 신부에 대한 영화를 봤다.
다미안 신부는 하와이 근처 몰로카섬에서 한센인을 돌보다가,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49세에 숨을 거둔 인물이다.
지난해 교황 베네딕토16세는 그를 성인 반열에 올렸다.
이 신부는 그 영화를 본 뒤 사제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인제 의대를 졸업한 그는 집안의 기둥이었다.
그는 어머니께 “사제가 되겠다”는,뜻을 밝혔다. 신부가 된 형도, 수녀가 된 누이도 있었다.
어머니는 눈물로 반대했다.
남의 아들은 (신부로) 가면 다 훌륭하고 거룩해 보이던데,왜 내 자식은 몇 명이나 데려가시냐?”고 반문했다.
그는 “어머니께 효도 못 하고, 벌어주지도 못 해서 죄송하다.
그런데 하느님께 자꾸 끌리는 걸 어떡하느냐?”고 울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뒤늦게 신학대에 진학했다.
다큐멘터리 속의 이 신부는 자신에게 묻고, 답했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까, 성당을 먼저 지으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를 먼저 지었을 것 같다.”
의사로서도 소외된 이웃을 도울 수 있다고,왜 굳이 아프리카까지 갔느냐고,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다고.그 모든 물음에 이 신부는 이렇게 답했다.
예수님께선 ‘가장 보잘것 없는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화를 보던 관객은 눈물을 흘렸다.
그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메시지 앞에서 솟는 눈물이기도 했다.
이태석 신부의 묵상,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 말씀 하셨지,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수단에서 신부 겸 의사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이태석 신부는 2년 마다 한 번씩 휴가차 한국을 찾는데, 이번에는 대한의사협회의 초청으로 대한의사협회 창립 100주년 기념행사인 ‘해외활동 의사 초청 심포지엄’에 참가하고자 고국을 방문했다.
이태석 신부는 의사 공부를 하고 군의관을 마친 후, 로마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사제 서품을 받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어릴 때부터 카톨릭 신자로 원래 꿈이 ‘의사 신부’가 되는 것이었다. 대학교에 진학 중이던 1999년, 이태석 신부는 여름 방학 기간에 아프리카를 가게 되었는데 하루 한 끼로 연명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보고 그 곳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2001년 아프리카 중에서도 가장 낙후한 곳이 수단이란 생각에 수단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아프리카 수단
이태석 신부가 의료봉사활동 중인 수단은 실제로 보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된 곳이다. 수단은 내전과 기아가 얼룩진 곳으로 아프리카 원주민이 살고 있는 남수단과 아랍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북수단으로 나뉜다. 두 곳은 인종과 종교 등 상황이 달라 거의 두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이 중 이태석 신부가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곳은 남수단으로 가난은 물론 전기나 전화, 수도 등 문화적으로 낙후된 지역이고 1년 내내 50도를 넘나드는 혹서의 땅이다.
봉사활동
- 의료봉사
처음에 이태석 신부가 수단에 왔을 때 반경 100km 이내에 병원은 물론 환자를 보는 의사들이 없었다. 병원의 필요성을 느낀 이태석 신부는 2000km 떨어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트럭으로 2~3개월에 걸쳐 필요한 자재들을 공수해 2004년에 병원을 건축했다. 이태석 신부는 하루에 150~200명 정도의 환자를 보는데, 병원을 찾는 환자들 중에는 말라리아, 장티푸스, 이질 등 감염성 질환자들이 많다. 복부, 임파선 등 각종 결핵환자들과 한센병 환자는 물론 아프리카 오지라서 뱀이나 악어에 물려서 오는 환자도 가끔 있다. 또한 원주민들이 살고 있어서 부족 간의 전쟁으로 창에 찔리거나 총에 허벅지 관통상을 입은 환자도 심심찮게 있다.
- 교육활동
이태석 신부는 의료봉사활동은 물론 교육활동도 하고 있다. 이태석 교사가 머무는 지역에는 초등학교나 중학교 등 학교가 전혀 없어서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이에 이태석 신부는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약 400명 정도의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현재는 학교 규모가 점점 커져서 18개의 교실에서 1400명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로 성장했다.
이태석 신부는 교육 외에도 음악도 가르치고 있다. 수단은 오랜 내전을 겪은 나라로 그로 인해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 상처를 음악으로 치료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피리부터 시작해 기타, 오르간을 가르치다 4년 전에 10개의 악기와 35명의 학생들로 구성된 밴드를 결성했다.
톤즈 사람들은 그를 “쫄리 신부”라고 불렀다.
‘존 리(John Lee)’라는 세례명을 그렇게 발음했다.
많은 사람이 이 신부에게 물었다.왜 굳이 신부가 됐느냐고,
의사로서도 소외된 이웃을 도울 수 있다고,
왜 굳이 아프리카까지 갔느냐고,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이 많다고.
그 모든 물음에 이 신부는 이렇게 답했다.예수님께선 ‘가장 보잘것 없는 이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화를 보던 관객은 눈물을 흘렸다.
그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메시지 앞에서 솟는 눈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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