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풍경

추억의 비닐우산 이야기

이모이모 2023. 10. 24. 19:09

▣▣추억의 비닐우산 이야기

추억의 50년대 지우산(紙雨傘)과 60년대 비닐우산 

1950-60년대에는 ‘지우산(紙雨傘)’이라는 종이우산과 ‘비닐우산’이 있었다. 여기에서의 ‘지우산’이란 ‘대오리’로 만든 ‘살’에 기름먹인 종이를 발라 만든 우산을 말한다. 우리들이 어릴 때는 비가 오면 ‘지우산’을 받고 다니기도 했다. 그렇다고 비가 올 때마다 썼던 것은 아니고, 어쩌다 운이 좋으면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외출용(外出用) ‘지우산’을 얻어 쓰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의 시골에는 ‘비닐우산’이나 ‘천’으로 만든 우산은 아예 없었고, 있다손 치더라도 몇몇 부잣집이 아니면 거의 다 ‘삿갓’을 쓰거나 ‘마다리’를 뒤집어쓰고 다녔다. 아니면 ‘보릿짚 모자’에 ‘우장’을 받쳐 입고 다녔고, 어린이들은 거의 그냥 비를 맞고 다녔다. 당시의 ‘지우산(紙雨傘)’은 공장(가내수공업)에서 만들기도 했지만, 시골에서는 거의 모든 가정집에서 만들어 사용했다. ‘지우산’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간 일손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40-50년대 유행하던 지우산 

지우산(紙雨傘)’을 만들려면 우선 질 좋은 ‘닥종이’를 구하고, ‘우산꼭지’를 만들 ‘때죽나무’를 잘 말려서 댓살이 들어갈 수 있는 ‘홈’을 파야 된다. 우산의 ‘댓살’은 오래되고 단단한 대나무를 골라서 잘 다듬어 마흔다섯 개로 쪼개어 ‘실’을 꿰맬 수 있는 구멍을 뚫고, ‘우산꼭지’ ‘홈’ 파인 곳에 하나하나 집어넣어 빠지지 않도록 ‘실’로 단단히 매어야 한다.

‘우산살’은 간격이 일정하게 살 끝에다 튼튼한 ‘실’로 고정(固定)하여 엮고, ‘우산대’는 직경(直徑)이 2cm정도 되는 곧은 대나무를 골라 우산을 폈을 때 고정시키는 ‘고정대(固定臺)’를 설치하면 어느 정도 재료(材料)준비가 된다.

준비된 ‘한지(韓紙)’를 원형(圓形)이 되도록 재단하여 ‘한지’가 이어지는 부분이 ‘우산살’에 가도록 하여 ‘풀’로 잘 붙인 후 ‘우산꼭지’와 ‘우산대’가 끼워진 곳에 물이 새지 않도록 ‘한지’로 감싸서 실로 잘 묶어야한다.

‘한지(韓紙)’가 물에 젖으면 찢어지지 않도록 ‘들기름’을 끓여서 우산에 붙인 ‘한지’ 위에 골고루 발라 온돌방에 세워서 불을 지펴 열을 가해주면 기름의 끈적끈적한 것이 걷히면서 보송보송하게 건조(乾燥)된다. 대충 이런 식으로 ‘지우산’을 만드는데, 실제(實際)의 정성과 손질은 여간 어렵고 힘 드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힘들게 만들다보니 주의력(注意力)이 부족하고 힘이 약한 아이들에게는 여간해서 ‘지우산(紙雨傘)’을 쓰게 하지 않았다. 부주의(不注意)하거나 힘에 부쳐 바람에 넘기기라도 하면 그 엄청난 공력(功力)이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록 힘들게 만들고, 인기가 있었던 ‘지우산’의 전성기(全盛期)도 잠깐 왔다가 1960년대 중반기(中半期)에 등장한 ‘비닐우산’에 밀려 쇠퇴하다 지금은 그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골동품(骨董品)이 되고 말았다.

▲접어 놓은 지우산

다음은 ‘비닐우산’ 얘기다. 어렵던 시절 우리들은 ‘비닐우산’을 즐겨 쓰기도 했다. 당시 아이들의 대부분은 맨발에 검정고무신, 파란색 ‘비닐우산’이면 최상의 ‘패션’이 되었다. 따닥거리며 비닐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유난히 커서 재미도 있었고, ‘마다리’나 ‘비료포대’를 뒤집어 쓴 아이들을 보면 우쭐하게 만들었던 ‘비닐우산’. 그러나 이것도 세태(世態)의 변화와 더불어 어느새 슬그머니 우리주변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파란우산 빨간 우산 찢어진 우산~♪' 어린 시절 즐겨 부르던 이 동요(童謠)도 어느새 아이들의 노래 레퍼토리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비닐우산’이 그래도 우리들의 추억(追憶) 속에는 크게 자리 잡아 시(詩)의 한 구절로 되살아나기도 하고 행위예술(行爲藝術)의 소재로 선택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 대나무로 만든 ‘비닐우산’이 첫 선을 보인 것은 지난 1960년대. ‘철제우산(鐵製雨傘)’이 1950년대 한국전쟁 무렵에 생산된 것에 비하면 오히려 태생(胎生)은 늦은 셈이다. 당시 ‘비닐우산’은 지금처럼 댓살이 10개짜리가 아니라 30개짜리로 ‘제대로 된 우산’ 취급을 받았다. 때문에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이 ‘비닐우산’을 비오는 철이 지난 뒤에도 고이 간직해 뒀다가 이듬해에 다시 쓰곤 했었다

60년대 우산 파는 아이들 모습 

겨울철에 비닐우산 ‘댓살’을 잘라내 ‘연’을 만들었다가 아까운 우산(雨傘)을 망쳤다고 어머니로부터 꾸중을 듣던 기억은 그 당시 ‘비닐우산’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게 하기도 한다. 당시의 ‘비닐우산’은 또 어느 부분도 버릴 것이 없었다. 부러진 ‘댓살’은 가지나 고추 모종의 ‘지주대’로 사용되었으며, 손잡이는 검객(劍客)을 흉내 내는 개구장이들의 장난감으로 안성맞춤이었고, 말 안 듣는 아이들의 회초리로 모습을 바꾸어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처음 출시될 때의 비닐우산  

여자애들이 책보를 허리에 매고 등교중이다

그러나 이토록 인기가 있었던 ‘비닐우산’도 1970년대 말 2단 접이식 ‘자동우산(自動雨傘)’이 본격 생산에 들어가면서 서서히 빛을 바래기 시작했다.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뒤집히거나 부러져 1회용 우산 노릇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대부분 수작업(手作業)으로 생산되어 수지타산(收支打算)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자가용 승용차(乘用車)가 늘어나면서 ‘비닐우산’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어갔다.

그뿐이 아니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중국산(中國産) ‘플라스틱 우산’이 마구 수입되는 바람에 ‘비닐우산’ 제조업체(製造業體)들이 대부분 도산(倒産)해버렸다. 그러나 ‘비닐우산’은 여전히 우리들의 마음 한구석에 추억(追憶)으로 아로새겨져 시(詩)로 승화되기도 하고, 때로는 현대미술(現代美術)의 소재로 재탄생되기도 한다.

‘비닐우산’이 사라져가던 지난 1995년 8월 서울 시립미술관(市立美術館)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 표현매체전’에는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이란 작품이 선을 보여 주목을 받기도 했고, 그 후 과천미술관(果川美術館)에서 재연되기도 했었다. ‘임시변통의 비 가리개’라는 뜻으로 우리사회 중년층의 의식구조(意識構造)에 깊숙이 자리 잡았던 ‘비닐우산’은 이제 아련한 추억거리로 밀려나고 말았다.

비닐우산에 얽힌 추억도 더듬어보면 부지기수다. 언젠가 시내버스로 통근(通勤)하던 시절,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접어들고 버스에 오르자 그날따라 안내양(案內孃)은 친절하게 우산을 받아 승강대 곁에 세워주었다. 그러나 목적지에 이르러 우산을 찾으니 새우산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엔 헌 우산 하나가 뎅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 애꿎은 안내양에게 불같은 호통을 쳐서 울리기도 했지만, 이때의 일로 그 안내양과는 한동안 친하게 지내기도 했고, 자주 공짜 승차(乘車)를 하곤 해서 ‘비닐우산’ 몇 십 개의 이득을 보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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