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연애인 세개 (210)
뱀사골 다시내
▣▣ 가수 송민도 1923년 경기도 수원시 출생으로 감리회의 목회자인 아버지 밀레서 자라 평안남도 삼화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이화여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잠시 유치원에서 보모로 근무했으며, 이후 중국 연길시로 이주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으며, 1947년에 서울중앙방송국 전속가수 모집에 응시해 합격하면서 가수로서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데뷔곡이었던 '고향초'가 많은 사랑을 받으며 인지도를 얻게 되었으며, 6.25 전쟁 중에는 국군 위문공연을 다녔다. 종전 후, '나 하나의 사랑', 그리고 가수 안다성과 함께 발표한 '청실홍실'[2]이 아주 많은 인기를 얻게 되어 1950년대를 대표하는 여가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카츄사의 노래..
▣▣ 가수 최숙자 별세 1965년 신세기레코드에서 발매한 신민요집 「갑돌이와 갑순이」는 1960년대 여성 신민요 가수들이 대거 참여한 프로젝트 음반이다. 수록곡 중 최숙자, 김세레나가 듀엣으로 부른 타이틀 곡 는 지금도 사랑받는 곡이다. 는 형석기가 편곡했는데 1절은 최숙자, 2절은 김세레나, 3절은 두 가수가 함께 듀엣으로 불렀다. 1절을 부르는 최숙자의 목소리는 ‘청음의 꾀꼬리 목소리’라는 별칭답게 가공되지 않은 깨끗한 고운 소리다. 2절의 김세레나는 약간의 기교가 들어간 목소리다. 김세레나는 기교가 많이 섞인 섹시한 목소리로 유명한데, 이 음반에서는 데뷔 초기여서인지 아직 기교가 많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 를 김세레나가 솔로로 다시 부르면서 그녀의 노래로 더 유명해졌다. 음반 재킷은 머리에 끝을 질..
▣▣,가수 이금희 이금희(본명:이대금, 1940년 9월 15일 ~ 2007년 2월 20일)는 대한민국의 가수였다. 1959년 미8군 무대에서 가수 첫 데뷔한 그녀는 이후 1960년대에 본격 가수로서 활동하였다. 2007년 2월 20일 뇌출혈 합병증에 의하여 사망하였다. 향년 68세. 대표곡으로는 '키다리 미스터 김' 이 있으며, 한국 최초의 팬클럽을 보유했던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키다리 미스터 김' 을 발표했으며, 이 곡이 대히트를 치면서 많은 대중들로부터 환호를 받았다.[1] 또한 그녀는 한국 최초의 댄스가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팬클럽을 보유했으며, 그 팬클럽의 가입 조건이 키 180cm 이상이라고 한다. 2007년 2월 20일에 뇌출혈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해 별세했다. 향년 66세.
▣▣ 가수 신카나리나 별세신카나리아의 본명은 신경녀(申景女)이다. 1912년 10월 26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났다. 원산의 원산루씨고등여학교 1학년을 다니다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했다. 우연히 나간 교회에서 목사의 자녀였던 성악가 남매 이인범, 이인근, 이옥현을 만났고, 이옥현에게 성악지도를 받았다. 16세가 되던 1932년, 극작가 임서방이 이끌던 악극단 '조선예술좌'에 입단하며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맑고 깨끗한 음색과 귀여운 외모에 호감을 느낀 임서방은 '신카나리아'라는 예명을 지어 주었고, '신무대악극단'의 악극 무대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막간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다. 1933년 와 등의 노래를 발표하며 데뷔했지만, 오히려 악극단의 막간 무대에서 부른 이정숙의 노래 , 등이 크게 인기를 얻었다...
▣▣ 가수 이동원 별세 가수 이동원이 지난 14일 지병인 식도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0세. 고 이동원은 개그맨 전유성이 있는 전북 남원으로 옮겨 투병 생활을 하던 중 전유성이 임종을 지킨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한 가요계 관계자는 "전유성 씨가 과거 이동원 씨 집에서 함께 산 인연이 있어 이동원 씨가 말년에 남원의 전유성 씨 집에서 함께 지냈다"고 말했다. 빈소는 동국대 일산병원 장례식장 15호에 마련됐다. 발인은 16일 오전 11시 30분 거행되며 장지는 일산 청아공원으로 결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