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풍경

북한 김일성 시조 김태서의 묘

이모이모 2023. 10. 24. 18:33

▣▣,북한 김일성 시조 김태서의 묘

전주 김씨 시조 김태서의 묘

 

  모악산(794)

  등산로 및 소요시간

  - 등산로 (약 8km) : 완주군 구이면 관광단지→선녀폭포→김일성 시조묘 →선녀폭포→대원사

                           →수왕사→무제봉→정상→심원암→연리지→금산사→모악산관리사무소

  - 소요시간 : 약 3시간

  챙겨본 곳 : 모악산 고은 시비, 전주김씨 김태서묘(김일성32대 시조묘),  대원사, 수왕사, 

                      母岳형상(쉰길바위), 連理枝, 금산사( 국보1, 보물 11점),  증산교본부

 

전주김씨 시조는 경순왕 4자의 殷說의 8 세손(경순왕의 9 세손) 金台瑞이다.

김일성이 전주김씨 32세손으로 알려져 매스콤을 탔던 묘소이다.

未方을 등지고 丑方을 향하는 未坐丑向 으로 자리 잡은 묘이다.

 

▣▣,김태서와 전주김씨  

김일성(1912-1994)은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하리에서 아버지 김형직(金亨稷)과 어머니 강반석(康盤石)의 삼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칠곡은 그의 외가가 있었던 곳이다. 오늘날 평양 만경대이다. 동생으로 김철주(金哲柱)와 김영주(金英柱)가 있다

 

김일성의 전주김씨 12대조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평양으로 이주했다. 김형직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벌인 한국의 독립 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 강반석은 기독교도였고, 외할아버지 강돈욱은 칠골교회의 장로였다. 김일성의 외가는 큰 외삼촌 강진석(康晋錫)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항일 민족운동과 관련을 맺고 있었으며, 강돈욱은 평생을 교육사업에 헌신한 기독교인이었다.

 

1919년 일곱 살이었던 김일성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 김형직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장백현 팔도구에서 팔도구소학교를 다녔다. 그 뒤 자식의 장래를 생각한 김형직의 결심에 따라 1923년 초부터 1925년 초까지 평안도 대동군 용산면 하리(下里) 칠골에 있는 외가에서 머물면서 창덕소학교에 다녔다.

 

창덕학교는 1907년 하리 장로교회가 중심이 되어 세운 5년제 학교인데, 김일성의 외할아버지인 강돈욱도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한때 교장을 맡기도 했다.

김일성은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소련의 붉은 군대를 따라 소련군 대위 신분으로 평양에 들어와 김영환(金英煥)이라는 가명으로 정치공작을 폈다. 곧 소련군 소령으로 진급하고, 그해 10월 14일 소련군 사령관 로마넨코 소장이 평양 시민들 앞에서‘김일성 장군’이라고 그를 소개한 뒤부터 김일성으로 행세하였다.

 

처음에는 자신을 제6사단장 및 제2방면 군장이던 김일성이라 주장하였다. 실제 독립운동을 한 김일성은 만주 독립군으로 활동하면서도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아 일반 대중이 쉽게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전공(戰功)만은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상태였다.

김일성은 북한으로 들어와 1당 독재·1인 독재·1족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했다. 소련에서 귀국하여 국내에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실권 구축을 위해 더욱 숙청을 과감하게 진행하였다.

김일성은 1족 독재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김정일(金正日)에게 정치 경험을 쌓게 한 후 후계자로 삼았다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의 본관은 전주김씨다. 전주김씨의 시조묘는 전주 모악산에 있다. 전주김씨의 선조는 본래 경주김씨였다. 그러나 여러 대를 내려오다가 고려 때 문장공 김태서(金台瑞)가 경주김씨에서 전주김씨로 분관하여 전주김씨가 된다. 그는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대안군(大安君)의 후손이다.

 

1928년에 간행된 족보를 보면 시조묘가 그려져 있는 전주 모악산 일대가 그려져 있고 시조가 김태서임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또 김태서의 32대 손으로 김일성의 본명인 <김성주(金成柱)>와 동생 <김영주>의 이름이 나와 있다.

 

최근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은 방북한 남한 언론사장단과의 오찬회동에서 "남쪽에 가서 그곳(시조 김태서의 묘가 있는 모악산)에 갈수 있으면 시조묘를 참배하겠다"고 밝혔다. 김일성 주석의 자서전인 <세기와 더불어> 제1권에서 "우리 가문은 김계상 할아버지 대에 살길을 찾아 전라북도 전주에서 북한으로 들어왔다.만경대에 뿌리를 내린 것은 증조할아버지(김응우) 대부터였다"고 적고 있다.

김태서(金台瑞)는 고려 무인 집권기인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의 5왕조에 걸쳐 벼슬을 지냈다. 그는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경주 일대를 폐허로 만들자 가족을 데리고 전주로 이주한다. 그가 전주군(全州君)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전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김태서의 아들 김약선은 무인정권의 집권자이던 최이의 사위다. 또 그의 딸은 원종비가 되어 충열왕을 낳았다.

시조의 손자인 김혼은 고려 충열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왕을 대리하여 행성(行省)의 일을 맡아볼 정도로 총애와 신임이 두터웠다. 김태서로부터 시작되는 이 집안은 명종 이후 충열. 충선왕대에 걸쳐 고려에서 크게 번성한다.

김경(金敬)은 성종 10년 여진 정벌에 공을 세운다. 그 뒤 전주에 있는 가족을 함경도 지방으로 이주시켜 함경도 전주김씨의 파조가 된다. 

 

김경의 맏아들 김수산의 후계는 경원에 그대로 살았다. 김태서의 셋째 아들 김경손의 자손들은 영변 일대와 선천. 철산. 안주. 평양. 강서. 중회 등 대체로 황해도와 평안도 일원에 살았다.

김경손은 고종 18년 구주성 싸움에서 몽고군을 물리치고 공을 세웠다. 그는 또 고종 24년에 일어난 초적(草賊) 이연년의 난을 평정했다. 고종 36년 최이가 죽고 그 아들 최항이 정권을 장악한다. 최항은 김경손이 민심을 얻는 것을 시기하여 백령도에 귀양 보냈다가 2년 후 죽였다.

 

한편 김일성 사망을 전후해서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모악산 중턱에 있는 전주김씨 시조묘가 알려지면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시조 김태서의 묘가 명당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이 묘소는 더욱 유명해졌다. 조상의 묘를 잘 썼기 때문에 후손이 빛을 보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았다.

전주김씨 집성촌은 거의 북한에 있다.  1930년 당시 전주김씨의 자손들은 함북 명천. 경성. 길주군 일원, 함남 영흥군. 흥남시 일원, 고원군 영동면, 문천군 문천면, 신흥군 원평면, 평북 초산. 영변. 강계군 일원, 자성군 중강면, 후창군 후창면, 평남 평양시. 평원군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남한에는 경상북도 의성군 신평면 청운리가 전주김씨 집성촌이다. 전주김씨는 2000년 현재 57,979 명이다. 그러나 북한의 인구를 합치면 이 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전주 김씨 시조인 김태서의 묘.

 

군사정권 시절 이 묘는 공공연한 국가 기밀로 관리되어 접근이 금지 되었으며

이곳을 찾은 풍수지리가 들이 덩치 큰 사람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단다.

▲그것은 바로 김일성(金日成)의 32대 조상 김태서의 묘가 위치했기 때문이며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그 같은 일이 없어졌단다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보면 김정일은 북한 최고 통치권자로 행세할 것이지만,

김씨 일족의 권력 세습은 김정일에서 끝나고 더 이상 세습되지

않을것이라는 얘기이다.  

 

공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전주(완주 또는 완산)는 하나의 분명한 특징을 갖고 있다.

조선과 북한이라는 두개의 왕조(?)를 개국한 성씨의 본관이라는 사실 말이다.

 

게다가 본관과는 무관하지만

견훤이라는 걸출한 신라장수 출신의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공간

또한 완산이 아니던가.

 

개연성치고는 이건 너무 과한 것 아닌지.

참으로 씹고 또 씹고 곱씹어볼 일이다.

 

그러고 보면 전주라는 공간은 開國과 王朝 또는 王都와 뗄라야 뗄 수 없는

필연적인 요소가 분명 있음직도 하다.

그것을 굳이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어떨까.

모악산을 안고 있는 전주를 말이다.

당대 최고의 풍수지리가로 통하던 육관 손석우는 전주 모악산의

전주 김씨 시조인 김태서 묘를 보고서

그 후손인 김일성이 49년동안 절대 권력을 행사하고 1994년 9월14일에

운이 다한다고 예언했는데,

1994년 7월8일에 김일성이 심장마비로 죽자 일약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